제목 | 송영진 신부님_<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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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06 | 조회수60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4-17)”
1)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은
하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고 슬퍼하는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실천하는 단식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단식입니다.
2) ‘새 옷’과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등을 뜻합니다.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바리사이들의 규정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는,
“헌 옷을 꿰매려고 새 옷을 조각내지 마라.”입니다.
16절의 표현만 보면, 헌 옷이 찢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
같은 표현인데, 예수님 말씀의 뜻은 ‘헌 옷’을 잘 보존하라는
것이 아니라, ‘헌 옷’은 그냥 버리라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도 같은 뜻입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라는 말씀 때문에,
‘헌 가죽 부대’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헌 가죽 부대’는
그냥 버리고, ‘새 포도주’를 잘 보존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구약은 버리고 신약만 잘 보존하여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은 신약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들을 실천하는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구약성경과 구약의 율법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복잡한 규정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규정들을 모두 무시하셨고,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원히 ‘새 옷’이고, ‘새 포도주’입니다.
그렇지만 만일에, 바리사이들 같은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킨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겉으로만
지킨다면, 또는 ‘의무감’으로만 지킨다면,
그것은 ‘새 옷’을 ‘헌 옷’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되고,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의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어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을 통해서 참된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얻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지금 신앙생활에 기쁨은 없고 부담감만 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표지가 됩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성직자들에게 있습니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또 신자들의
여러 가지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않느냐고 야단만 치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쁨을 빼앗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남들은 다 쉽게 하는 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못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신자들의 사정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
그것은 ‘목자’들의 임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여기서 ‘먹고 마시는 일’이라는 말은, 음식 문제에 관한
유대인들의 규정들을 가리키는데, 넓은 뜻으로는 유대인들의
잡다하고 복잡한 규정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의 뜻은, “규정들만 잘 지킨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들어간다.”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치유와 화해의 기쁨을 말해야 합니다.
사실 의무감으로 보는 고해성사는 회개도 아니고,
그것으로는 치유와 화해의 은총을 얻지도 못합니다.
판공 때에 의무적으로, 억지로 고해성사를 보면서,
점점 더 고해성사가 부담스러워지고, 그래서 고해성사를
기피하게 되는 것은,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의 잘못입니다.
단식재, 금육재, 여러 전례들과 기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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