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잔칫날에 어찌 단식이라니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마태 9,14-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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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7-05 | 조회수60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잔칫날에 어찌 단식이라니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마태 9,14-17) 혼인 잔치가 열렸고 구원자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잔칫상에 오시어, 이미 새로운 시대가 열려있다. 만일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았더라면, 그들은 하늘나라의 잔칫상의 손님으로 그 잔치의 즐거움을 누렸을 게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그 새로운 시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늘 세속적인 율법 해석과 비난의 시각으로 살았기에. 반대로 이미 하느님나라를 사는 이들도 많이 있다. 늘 희망차게 때때로 닥치는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고 언제나 하느님 편에서만 사는 이들이다. 다 만사형통인 것 같지만, 어쩌면 그들은 오로지 하느님 뜻으로 삶을 산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일 게다. 사실 유다인들의 율법에는 단식이 엄격히 규정되었다. 단식은 그네들의 고유 전통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단식의 이유에 앞서, 보여 주기식인 단식 그 자체에만 매달렸다. 목적 없는 단식은 오히려 육체를 괴롭히는 고통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단식은 주님께로 다가가는 수단이다. 절제를 통하여 오직 마음을 다잡아 그분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니까.
성체를 모시는 날은 그야말로 잔칫날, 하지만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단다. 삶이 늘 축제가 아니란다. 믿음이 흔들리고 신앙생활이 힘겨워질 때는 절제를 해서라도 내 감정, 욕망을 다듬어 시선을 그분께로 고정시켜야 하니까. 그러면 주님은 다시 힘을 주시리라. 단식은 언제나 은총이니 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자신이 신랑이기에 잔칫날에 단식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에게 구원을 베푸시고자 우리에게 오셨다. 잔치에 초대된 우리는 그분 사랑과 그분께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잔칫상 차려놓고, 덩실덩실 춤추며 찬미의 노래 부르자. 이같이 기쁜 날 어디 아니 놀 수 있으랴! 사실 예수님께 단식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분께서 참으로 원하셨던 것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감지하고 그 초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또한 편한 것만 찾는 믿음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겠다는 굳센 결심을 간직할 때만이, 온전한 삶을 누린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단식은 이러한 관점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또한 단식과 혼인 잔치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헌 옷에다 새 천 조각을 대어 꿰매는 것만큼 어색하다. 단식은 하느님과 새 관계를 이루기를 바라는 회개의 수단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신랑을 빼앗길 게고, 그때에 제자들은 단식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새로운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길 것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의 백성이 슬퍼하듯이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게다. 사실 신약의 백성은 자의 반 타의 반 비록 신랑을 빼앗겼지만, 그 신랑을 곧 되돌려 받을 것이리라. 아니 그때부터 신랑과 영원히 함께 살리라. 그렇게 다시는 단식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배불리 먹고 마시는 그런 시대를 살아갈 게다. 그러니 보여주는 단식을 굳이 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예수님은 바로 혼인 잔치의 신랑이시다. 그를 위해 잔칫집에 어울리게 흥겹게 풍악 울리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좋은 날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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