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9, 32~33)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삼 말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말이란 말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되는데 이를 풀이하면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말이란 곧 마음을 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란 마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요, 뜻을 나타내는 음성적인 부호입니다. 이처럼 말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말할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다른 동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뇌의 발달과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뇌는 성장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이를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없다면 뇌는 스스로 진화를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인간에게는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뇌가 만들어 내는 생각들을 세상에 영속적으로 전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뇌의 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할 말도 많아지게 되고, 할 말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 세상에 할 일도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세상을 잇는 다리의 시발이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엄청난 축복이며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9,33)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나요. 물론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만난 적이 많습니다만 저 역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은 아직껏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마귀 들려 헛소리나 괴성을 질러대는 사람 여러 명은 보았습니다. 만일 마귀 들린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말들을 하였을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부드러운 말을 할까? 남을 칭찬하는 말을 할까?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할까? 아니면 남을 욕하는 말을 할까? 남을 흉보고 멸시하는 말을 할까? 남의 흠을 잡고 비난하고 모욕하는 말을 할까? 아마도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 들린 사람이,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벙어리로 있는 것이 훨씬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니 어쩌면 그 역시도 즈카리야처럼 말문이 열리자,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찬미의 소리가 터져 나왔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마귀를 쫓아내 주었는데도 이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겁니다. 만일 그가 찬미와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돌들과 나무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이 찬미하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마귀 들린 사람이 말 못하였다는 표현은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오신 분들도, 영적 지도 후 자연스럽게 개인 기도를 하라고 하면 손사랫짓하면서 거절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감사 기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느끼지 못했으며 그러기에 감사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을 헐뜯고 욕하고 비난하고 흉보는 말은 잘하는데 주님을 찬미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 앞에서 자기 자랑은 잘하면서 기도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하듯이 기도 말도 배워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하루아침에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 하면서 말을 배워가는 것처럼 기도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말도 꾸준히 배워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의 언어이기에 사랑을 느끼고 체험할 때, 기도 말을 자연스럽게 잘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은 경험이 없으면 사랑한다, 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어떻게 사랑의 언어인 기도 곧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군중들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9,33)라고 감탄하며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놀랍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9,34)하고 모욕하며 예수님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지켜봅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일에 대해 지극히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을, 치유 받은 그 사람과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놀라워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의 시선 곧 마음의 태도는 일어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된 삶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시대의 지도자들이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당대는 민중들이 그 피해를 입었고, 현재는 국민들이 그 부담을 겪으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9,36)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일꾼이 없어서 지금 세상이 하느님 포도밭에서 수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 제대로 된 일꾼들이 많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9,38)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10,14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