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하느님 사랑의 신비 체험의 일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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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13 | 조회수76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영적 면역력 증진과 더불어 온전한 삶”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조그만 구멍 하나만 뚫렸어도 깨진 항아리가 된다. 큰 예의는 작은 예의를 지키는 데서 완성된다.”<다산> 일상의 작은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크고 작은 예의가 없듯이 크고 작은 죄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는 온전한 삶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오래된 잘못을 말하지 말고 깔보는 표정을 지어서도 안된다. 갑작스레 방문하지 말아야 하며, 갑작스레 떠나서도 안된다.”<예기> 이 또한 삶의 지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깨어 있는 삶이라면 이처럼 일상의 지혜에도 충실할 것입니다. <예기>는 중국 고대 경전인 오경의 하나로, 예법의 이론과 실제를 풀이한 책으로 삶의 지혜를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하늘병원 진료차 방문후 떠나려 할 때 두 젊은 여자 직원이 청해서 고백성사를 줬습니다. 뜻밖의 청이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젊은 분들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은 참 갸륵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두분께 각기 기도문과 더불어 준 동일한 보속에 만족했습니다. “오늘 하루 병원 생활 중 환자들 겸손히 잘 섬기며, 기쁘고 감사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보속입니다.” 보속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하느님과 이웃을 겸손히 잘 섬기며 기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산다면 '참으로 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이 추구했던 유일한 목표는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는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정우 바오로 수사의 기일 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나 팔팔합니다!” 6월29일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날 영명축일을 지내며 건강을 뽑내신 88세 노령의 수사님이었는데 약 2주후 세상을 떠났고 당시는 아무도 선종하시리라 상상도 못했습니다. 더불어 떠오른 생각입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살아계셨다 해도 돌아가신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냥 시간만 연장된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삶도 많지 않은가? 나이 30에 죽어서 70에 묻힌다는 말도 있지 않나? 하루하루 선물 인생을 생각없이 낭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감 없는 죽은 삶도 비일비재하지 않나?”
어제 수도형제의 사랑의 권유로 함께 인근의 피부병 진료차 <소나무 한의원>에 들렸습니다. 진단은 “면역질환”이란 것이었습니다. 피부가 면역력이 떨어짐으로 인한 것이기에 장기적인 관리와 보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면역력이 좋고 강할 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피부이지만 면역력의 결핍은 만병의 시초라는 것입니다.
순간 연상된 마음의 면역력, 정신의 면역력, 영혼의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의 심각한 결과를 묵상했습니다. 피부 육신의 면역력에 앞서 이런 영적 면역력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다 싶었습니다. 이래서 영적 면역력의 증진을 위한 “신망애信望愛의 삶”, “진선미眞善美의 삶”, “평화와 기쁨”, “찬미와 감사”, “겸손과 섬김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영적 면역력에 대한 참 좋은 처방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 체험입니다. 인간의 본원적 치유는 하느님뿐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온마음을 다해 하느님 이름을 부름으로 웬만한 병은 다 나았다 합니다. 인간의 영육의 전인적 힐링은 물론 영적 면역력의 증진에 평범한 하느님 신비 체험인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는 확신입니다. 하느님 신비 체험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미사은총의 선물이 참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 신비 체험의 대가임을 깨닫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정말 두려워할 바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떠나는, 하느님과 단절되 영혼의 죽음입니다. 두려움 속에 포위되어 사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일상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외경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향한 외경의 두려움을 키우는데 흠숭의 기도가 제일입니다. 더불어 잊지 못하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매사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살아야 함을 절감합니다.
평범한 하느님 신비 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이사야의 소명 체험 처럼 비상한 하느님 신비 체험도 있습니다. 이사야의 소명체험에 앞선 날개 여섯 개 달린 사랖들의 하느님 찬미는 그대로 미사전례에 차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미사전례중 '거룩하시다' 장면시 꼭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의 고백을 연상하시기 바라며 이사야의 체험을 여러분의 체험으로 삼기 바랍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순간 사랖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날아와 이사야 잎에 대고 말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타는 숯을 대신합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이사야의 하느님 신비 체험을 그대로 차용한, 영적 면역력을 증진시켜주는 미사전례야말로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새삼 고맙게 깨닫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사야 예언자가 주고 받는 대화는 그대로 미사중 파견 예식을 연상케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하느님 신비 체험후 가야할 복음 선포의 자리는 각자 삶의 제자리입니다. 빛의 주님과 늘 함께 할 때 두려움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6,8). 아멘.
PS:지금 눈을 떠서 보내드립니다. 죄송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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