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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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7-13 | 조회수8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마태 10,24-33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 속에서 몰아내야 할 ‘거짓 두려움’과 우리가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된 두려움’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기게 된 이유는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죄를 저지른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을 피해 숨은 이유는 그들이 ‘알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하느님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었지요. 그들이 죄를 지어 마음 속에 ‘죄책감’이 생겼기 때문에, 그로 인해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 불편하고 힘든 일이 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피해 숨은 겁니다. 그렇게 자기들이 지은 죄로 인해 그들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왜곡되어 버립니다. 더 이상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 아낌 없이 베푸시는 분,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 벌 주시는 분, 빼앗아가시는 분, 속박하시는 분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것이 그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말은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라는 촉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카락 개수까지 다 헤아려 알고 계실 정도로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악과 멸망으로부터 지키시고 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악인들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물질적 피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고 심할 경우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도 하지만 그들의 한계는 ‘거기까지’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어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잃게될까 전전긍긍하는 ‘거짓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느님 뜻을 거스르면 어쩌나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면 어쩌나를 걱정하는 ‘참된 두려움’만 마음에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외심’이라고 부르지요. 벌 받을까 두려워 마지못해 하느님 뜻을 따르는게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그분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기에 기꺼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보면, 그런 마음가짐이 나를 구원으로 인도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가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아야만, 고통이나 불행을 겪지 않아야만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어린 아이의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시지 않고 광야로 보내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않고 고통을 그분께서 주시는 벌이라고 잘못 믿으며 두려움에 빠지면 ‘내가 믿는 그대로’ 됩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어야 하는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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