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의 사명과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파견받은 자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파견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도성이 잘살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파견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하느님 뜻대로 잘살았다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파견하셨겠습니까?
잘살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러니 파견된 예언자는 잘못 살고 있다고 쓴소리해야 하며,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이 도성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듣고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힘없는 사람은 억지로 참지만 힘이 있는 사람은
그리고 집단은 가만히 있지 않고 심지어 죽여 버리지요.
오늘 복음의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바로 그런 자들이지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자이고,
요한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면
그래도 그랬을까? 나라면 어떨까?
하느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여 니네베 임금과 백성들처럼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언자를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니 내게 쓴소리한 사람을 예언자라고 믿고 싶겠습니까?
성질이 나쁜 놈이요 배배 꼬인 놈이라고 매도하거나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내게 쓴소리하는 사람을 특히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이 파견한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예언자로 받아들일 겁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이 사람을 내게 보내셨는데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을 내가 교만 때문에 몰라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제가 이번 행진하면서 그리고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앞두고 저의 죄를 성찰하면서
제일 크게 반성한 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사랑을 더더욱 강하게 믿지만
하느님 사랑을 너무 내 식으로 믿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도 다 오냐오냐하실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역시 제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것인데
오늘 저는 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저의 믿음을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