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오병이어[五甁二魚]는 함께 나눔의 결실 / 연중 제18주간 월요일(마태 14,13-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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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8-04 | 조회수8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오병이어[五甁二魚]는 함께 나눔의 결실 / 연중 제18주간 월요일(마태 14,13-21)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 五甁二魚]로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먹인 내용은 그 일의 정황자체가 정말 구체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기적으로 그다지 생각지 않는 것 같다. 다른 건 쉽게 이해하여 받아들이면서도 이렇게 정확한 숫자까지 나열하면서 설명을 하여도 그냥 넘겨짚으면서 대충이다. 변죽만 울린 꼴이다. 무엇이 오해의 소지가 있어 ‘수박 겉핥기식 헛다리짚듯’ 하면서 넘어갈까? 다시 요약해보자. 예수님과 제자들, 그 많은 군중이 어느 저녁나절 외딴곳에 계셨다. 지금 그들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것들을 가지고는 그 많은 이를 배불리 먹이셨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단다. 먹은 이들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이게 ‘오병이어’ 이야기의 줄거리 핵심이다. 어쩜 이 이야기가 지금 현실적으로 가능이나 할까? 그러나 어쩌랴, 의당 믿을 수밖에는. 이걸 믿지 않는다면 천지창조, 노아홍수, 홍해 물 갈라짐, 광야 땅 하늘에서 먹을거리인 만나의 떨어짐 등의 기적을 어찌 믿을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고기잡이 기적과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의 그 포도주, 죽은 이들을 살린 것과 오랜 불치를 치유하신 것은 믿는다면서 말이다. 더구나 예수님 탄생과 십자가 죽음, 삼일만의 부활, 그리고 사십일이 지난 후의 승천을 믿는 우리가 기적의 축에도 끼지 않을 이 오병이어를 어찌 믿어보라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혹자는 그 많은 군중이 먹었던 게 그들의 것을 일부 내어놓은 것이라는 둥, 또는 먹지 않고도 마음으로만 배부른 거라는 둥 여러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닐 게다. 빵과 물고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거나, 또는 각자가 가진 것들을 송두리째 다 내어 놓았다는 것도 가능하다. 정녕 우리가 믿어보려는 신앙의 신비인 기적은 무에서 유로 변한 게 있어야만 한다나. 사실 오병이어로 그 많은 장정을 배불리 먹이고도 부스러기가 쾌나 남겨진 이 드라마에서나 있음직한 이야기는, 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난다. 생각을 바꾸어 우리의 처지를 보자. 기적 아닌 게 과연 있는가! 매일 매일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 지금 부담 없이 숨 쉬는 것, 이게 감사해야 할 기적이 아닐까? 달리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게 다 기적으로 느껴진다. 우리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깊어가지만, 나눔 실천하기를 꺼린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공동체는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였다. 아픔마저도 함께 했다. 그분께서 만나는 이 하나하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기에 모든 이가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게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매사에 깊은 관심을 두는 게 사랑의 기적을 만드는 출발이리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함께 나누셨다. 불평하지도 않으시면서 다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러내셨다.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시면서. 어려운 상황에서의 불평은 모든 해결 가능성을 막고 상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기만 한다. 반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는 온갖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기쁘게 극복하게 해 준다. 따라서 길가의 돌이 보석으로 변하는 식의 기적을 바라기보다 가진 것을 이웃에게 건네는 나눔의 기적에 동참하자.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힘든 처지에 놓인 이웃을 늘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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