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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공동체에서는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모두 내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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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13 조회수33 추천수2 반대(0) 신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5-20).”

 

 

 

1) 이 말씀은, ‘공동체의 형제애 실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이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14.18.26).”

 

몸의 일부가 병들었다면, 그것은 몸이 병든 것입니다.

 

손가락도 내 몸이고, 발가락도 내 몸입니다.

 

어느 지체가 무슨 병에 걸렸든지, 어떻게 얼마나

 

다쳤든지 간에 그것은 내 몸이 병들거나 다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애를 실천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로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공동체에서는 모두 내 몸이고,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병이 들었거나 어딘가를 다쳤다면,

 

가장 먼저 나 자신이 치료를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계명은 “네 이웃은

 

너 자신이니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네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입니다.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입니다.

 

만일에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는 일은 나의 권한이

 

되어버리는데, 우리에게는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 권한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네 형제가 주님께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단둘이 만나든지,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만나든지 간에,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나는 의인이고, 그는 죄인이니까, 의인으로서 죄인을

 

타이른다.” 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입니다.>

 

 

 

3)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라는 말씀은, 개인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노력해도

 

성과가 없다면, 공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서 자기 몸을 치료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어서 병원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일의 경중에 관한 문제입니다.

 

작은 상처라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반드시 병원에 가야 하는 큰 부상이나 큰 병이 있습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파문’은 ‘최종 선고’가 아닙니다.

 

파문은, 영구 추방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파문당한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주게 됩니다.

 

 

 

4) ‘공동체’, 또는 ‘형제애’ 라는 말 때문에

 

무의식중에 ‘남의 일’로 여길 때가 많은데, 만일에 죄를 지은

 

그 사람이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부모’ 라면?

 

또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자녀’ 라면?

 

그러면, 예수님 말씀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나의 부모나 자녀나 연인이 죄를 지어서

 

주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을 본다면?

 

그런 일을 보면서, 죄인의 심판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기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을 크게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나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나라 자체는 ‘지극히 행복한 나라’인데,

 

그 나라에 함께 들어오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극히 슬픈 나라’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금의 나를 보면서, 또 우리를 보면서,

 

하늘나라의 성인 성녀들과 가족들이

 

몹시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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