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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은총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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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21 조회수62 추천수3 반대(0) 신고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마태 20,1-5).”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9-16).”

 

1) 여기서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라는 말은,

뒤의 20절-23절에 있는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두 사도가 요청한 것입니다.

두 사도의 요청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마태 19,28).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고, 예수님께서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만 데리고 가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도는 자기들이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로서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은 포도밭에 맨 먼저 온 이들이, 늦게 온 이들보다

품삯을 더 받기를 기대한(요구한) 것과 같습니다.

 

2) 또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라는 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말과 비슷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맨 마지막에 온 이들’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과 같고,

‘맨 먼저 온 이들’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두 비유는 모두, ‘맨 먼저 온 이들,’ 또는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는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맨 마지막에 온 이들’, 또는 ‘작은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시기하거나

항의하지 말고, 그 자비에 동참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3) ‘구원의 은총’은 노동의 대가로 요구하는 품삯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일꾼들, 품삯’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신앙생활을 ‘노동’으로, 또 은총을 ‘품삯’으로

생각하는 것을 꾸짖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노동이 아니고, 은총은 품삯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그리고 ‘은총’은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4)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회개한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좋은 나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덜 좋은 나라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성당에 일찍 와서 잘 준비하고 미사 참례를 한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와 늦게 온 사람이 먹는 성체가 다를 수 없고,

일찍 왔다고 성체를 두 개씩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평생 마음껏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고,

그런 진정성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미사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밖에서 놀다가 영성체 때가

되어서야 성당에 들어와서는 성체를 받아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도 역시 어리석은 생각이고,

만일에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체 모독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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