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관대한 포도밭 임자이시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밭 임자가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구하러 장터로 나갑니다. 그는 첫 새벽에 만난 일꾼들을 자기 포도밭에 보내고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네 차례나 더 장터에 나갑니다. 거기에 일을 얻으려 기다리는 이가 있으면 자기 포도밭으로 보내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지요. 주인 중심이 아니라 일꾼의 바람를 우선하는 고용 방식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
분명 밭 임자가 첫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보았는데도 그들이 불평합니다. 가장 먼저 선택되었던 기쁨은 사라지고, 노동은 고생이 되었으며, 일한 시간과 수고가 억울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 경쟁 문화에서 자라난 우리에게 이 항변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공정과 평등의 기치 아래 상위 1%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가치, 노동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데 익숙한 세상이니까요.
타인이 덜 받는 것에 함께 분노한다면 정의, 연대, 사랑이겠지만, 타인이 동등하게 받는 것에 분노하는 것은 질투이고 시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루 밥값을 벌기 위해 하루종일 가슴 졸인 수고까지를 노동에 준하는 가치로 보아 주는 주인의 마음씀씀이와 관대함이 놀랍습니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마태 20,13)
주인이 그들에게 첫마음을 일깨웁니다. 오히려 합의를 뛰어넘는 허상을 품은 이는 첫 일꾼들인 셈이지요. 그들은 '조금만' 일한 이들이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가장 먼저 선택되어 마음 놓았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온종일 뿌듯했던 노동의 보람을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맞바꾼 형국이니 주인은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무한히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의 됨됨이와 자격을 따져 사랑의 양을 제한하거나 계산하는 분이 아니시지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도 안 될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주님 못마땅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 속 일꾼들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닮아 관대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가끔은 깃털 하나 꼽을 자리 없이 마음이 편협하고 옹졸해지니, 남이 무얼 더 받았는지를 살피기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에 더 주목하는 것이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사실 어쩌면 이런 주인 덕분에 우리는 무수한 죄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턱걸이로라도 포도밭 울타리에 아슬아슬 매달려, 아직까지 희망을 가지고 순례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는 목자들을 호되게 꾸짖는 주님의 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목자들도 그렇게 대해 주길 바라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 34,11)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그들 손에서 거두어 친히 보살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랑하는 양들을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방식에 맡겨놓았더니 사랑이 숫자나 도식으로 대치되어, 온기 없이 건조하고 냉랭한 조건 아래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으로 양떼를 돌보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누구이건 어떤 몰골이건 더, 더, 더 사랑하고, 그래서 더, 더 더 주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끝내는 목숨까지 내놓으실 만큼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이시니 이미 우리는 과분하게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목자 앞에서 보상과 댓가의 양을 비교하고 따지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잘났건 못났건, 의인이건 죄인이건 당신 포도밭으로 불러 함께할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괜한 곁눈질은 마음만 흐트릴 뿐이지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갑시다. 관대한 주인이시고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오직 하나의 관심사는 "나"뿐이랍니다. 주인의 이 눈먼 "내맘대로" 사랑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인공입니다. 그 주인이 그토록 아끼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