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 강론 2024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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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8-23 | 조회수8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37,1-14
그 무렵
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4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5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6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고,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라는 말마디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 곧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곧 생물학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1요한 4,12)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PS 평화 방송 강사로 계신 어느 신부님의 말씀으로는 자기 자신의 신앙 정도를 평가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말씀을 매일 마주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신앙의 위험 순위에 있으니 빨리 고백성사를 보라고 하더군요.. 여러분은 말씀을 매일 보고 자신안에서 생활화 하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축복 받으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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