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회개가 없으면, 기쁨도 없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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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9-01 | 조회수7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6-21)”
1)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레위기에 규정되어 있는
‘희년’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메시아 시대’를 뜻합니다.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희년 선포’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희년’이 이렇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 25,8-10).”
구약시대 때에, 희년이 되면 모든 토지의 소유권이
원래의 주인들에게로 되돌아갔고, 모든 빚이 탕감되었고,
모든 노예들이 해방되었습니다.
‘메시아 시대’는 그런 희년처럼 ‘모든 사람’이 온갖 억압에서
해방되는 시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메시아 시대 선포’는 곧 ‘기쁜 소식 선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선포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선포하신 순간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희년 제도는 제대로 실행되었을까?
실제 현실을 보면, 희년은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오히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급한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돈을 꾸려고 해도 꿀 수가 없었습니다.
희년이 다가올수록 이자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그러다가 희년이 바로 코앞에 닥치면 아예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탕감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희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고, 어떻게 하면 손해를 덜 보게 될까를 따졌습니다.
그러니 그 좋은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흐지부지하다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인데도
‘죽은 규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기쁜 소식’인데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권층 사람들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과 기득권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메시아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해방과 자유를
누린다는 말은 곧 그 나라에는 특권층과 기득권층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진 것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작은 이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권층과 기득권층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 기득권층에
속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복음을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달갑지 않은 소식’으로 받아들입니다.>
4) 기득권층 사람이든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든지 간에,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 되려면,
우선 먼저 사람들 쪽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변화는 참된 회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회개’를 먼저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희년’이라는 제도가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없어진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과 손해만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그런 식으로 대합니다.
그 모습은 부유하거나 가난한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와 신앙을 갖는 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익인가, 손해인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따지고 있습니다.
“세속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다.” 라고 아무리 말해도,
비웃기만 하고,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으로만 가는 사람들이,
옛날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회개 없이는 기쁨도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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