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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루카 4, 16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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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9-01 조회수64 추천수2 반대(0) 신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 시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4,19)                   

선거철이 되면 많은 후보자는 저마다 공약公約을 내세우지만, 그 공약이 막상 당선되고 나면 공약空約으로 끝나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겪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때마다 우리는 매번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회당에서 예수님의 선포는 공생활 동안 행하실 사목활동의 비전을 제시하고 출사표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후 공생활 동안 예수님의 구체적인 활동을 기록한 모든 복음 말씀이 바로 오늘 선포한 말씀으로 규합되고 집약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空約을 남발하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신의 公約을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의 활동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활동이 처음부터 주님의 영 곧 자비의 영의 열매라고 전합니다. 자비의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4,18)은 예수님의 활동이 바로 이 자비의 영의 역사이심을 밝힌 것입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9) 이를 통해 예수님의 주된 활동은 첫째, 잡힌 이들(=묶인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 대상은 바로 재물, 권력과 거짓된 사랑에 묶인 자들입니다. 둘째 활동은 눈먼 이들에게 다시 볼 수 있게 눈뜸을 베푸시는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욕심, 자만심 그리고 편견으로 눈먼 존재들입니다. 셋째는 억압받는 이들(=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데, 인간이 인생을 살면서 억압받는 주된 요인들은 여러 질병과 악령(=마귀, 사탄)에 시달리고 특히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죄책감)에 억눌리고 억압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용서와 참된 자유를 되찾아 주시려는 게 그분의 주된 구원 활동이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은 과거만이 아닌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주님의 자비로운 영의 활동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상에 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의 선포입니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인간의 어떤 상태나 처지와 관계없이 하느님의 공짜, 무상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며, 이렇게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상태의 모든 사람을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며, 예수님 당신 존재 자체가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임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4,22)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반전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이 구절로부터 그림의 색조가 밝음에서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발단은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 깊이 잠복해 있던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4,22)라는 부정적인 시선을 통해 그들의 속내가 확연히 드러나면서부터입니다. 이런 고향 사람들의 의중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의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4,23.24)하고 응대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놀라움 하지만 내면에는 편견과 선입견,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가득 찬 그들의 속내를 꿰뚫고 이렇게 적나라하게 고향 사람들의 이중성을 질타하십니다. 이런 고향 사람들의 환대와 적대, 놀람과 거부는 예수님을 향한 세상의 반응과 동일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서문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는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0~11) 

루카 사가는 한 마디로 예수님은 실패한 복음 선포자라는 점을 시작부터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과 고향 사람들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대한 기대의 차이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란 다른 곳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 나자렛에서도 보여주기를 그리고 그 기적으로 파생할 떡고물(=사람들이 몰려옴으로 지역 경기 활성화)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원의는 도력道力을 통한 기적보다 도심道心 곧 이미 시작한 하늘나라와 아빠 하느님께로 인도하려고 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과 고향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며,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기대가 크면 그 실망과 분노는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와 배척으로 급격하게 돌변할 수 있는 게 집단적인 악의 실체입니다. 이는 고향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복음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네요.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 몰았다.” (4,28) 그렇게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서 거부와 추방당한 것입니다. 이는 단지 고향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후에 모든 자기 백성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세상에서부터 추방과 십자가에 죽임당하심으로 절정을 이룰 것을 복음은 이미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더 이상 미련을 두시거나 연연하지 않으시고, 고향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4,30)라고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누구로 인해 방해받지 않으시고 홀연히 묵묵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나아가시는 주님의 모습이 왜 이리도 안타까운지 그러면서 그렇게 당당하심이 마냥 부럽습니다. 이것이 단지 나자렛의 하루만이 아닌 그분의 전 공생활 동안 드러나신 삶의 주선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주저하거나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함께하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영으로 말미암아 걸어가시는 주님을 본받아서 우리 또한 그분의 뒤를 따라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영으로, 영과 함께하심으로써 세상의 모든 이들의 묶임, 눈멂과 억눌림에서 참된 자유와 눈뜸, 해방의 삶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자비로운 영으로 말미암아 자유, 눈뜸 그리고 해방을 체험한 후 동일한 희망의 메시지를 세상 향해 선포하면서도, 그로 인한 거부와 배척으로 주저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시96,1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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