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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말씀을 듣고 화가 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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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백봉7 쪽지 캡슐 작성일2024-09-02 조회수96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4년 나해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말씀을 듣고 화가 난다면?> 

 

 

 

 복음: 루카 4,16-30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가난은 겸손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키웠기에 안다고 착각합니다.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결국 거북한 말을 하는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여 성경을 먼지가 쌓이도록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거북할 때 더욱 그래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이 거슬려도 아이들은 잘도 배웁니다. 


    며칠 전 제가 아는 세실리아 자매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직속 상사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누가 들어봐도 직속 상사가 문제였습니다. 자기 명예가 깎이는 것처럼 느껴지자 세실리아 자매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치며 야단을 쳤습니다. 집에 돌아와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그건 네 탓이야!”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은 듣기에 거북했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덮어버리고 기도도 끝내지 않은 채 잠을 자버렸습니다. 


    다음 날 주님께 그렇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다시 말씀을 잡았습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있는데, 그 신부님은 방 안으로 빛이 들어오면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나에게 잘못이 보이면 그게 빛이신 주님과 가까워졌다는 뜻이라고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의 탓도 있다고 인정이 되니까 나도 그리스도와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사에게 전화하여 차나 한잔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이 잘 풀렸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듣기 거북하다고 예수님을 절벽으로 던져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세실리아 자매는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머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은총이 왔습니다. 말씀을 주시는 분은 그것을 실현할 힘도 주십니다. 힘을 받기 위해서는 거북한 말씀과 오래 머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말씀은 은총과 결합할 때 진리가 됩니다. 진실해라. 누구나 다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말했을 때는 그것이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으니까 말씀도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가 거짓말하는 게 제일 싫다고 하셨을 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계속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말씀은 거북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기다리면 언젠가 옵니다. 


    그러나 만약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말씀의 전례는 가볍게 여기고 성찬의 전례만 중요하게 여기면 성찬의 전례에서도 어떤 은총도 받지 못합니다. 
    김범석 교수에게 찾아온 70세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은 힘들 거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들어본 바로는 거창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떠났습니다. 


    또 다른 노인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기대 수명을 듣고는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 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러 번 의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사실 6개월이란 시간은 은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이 있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었습니다. 말씀이 있는 사람은 6개월이 은총의 시간이었고 말씀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마지막 6개월이 불만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례가 먼저 있고 성찬의 전례가 오는 것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거북합니다. 강론이 길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씀을 통해 내가 변해야 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잡고 살려고 하면 은총을 주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려는 말씀을 잡으니 “다 주었다!”라는 은총으로 힘을 주셨던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말씀으로 삶을 변화 시킬 결심을 합시다. 그러면 은총도 따라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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