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라!" (5,4)
요즘 우리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그 유래는 이렇습니다. 오디세이아에 보면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집안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그의 친구인 멘토르 Mentor에게 맡깁니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 여 년 동안 멘토르는 텔레마코스의 아버지처럼 그를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후로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멘토는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입니다.
멘토와 멘티와의 관계와 달리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다른 여타의 스승들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그 무게 중심은 제자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여타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자비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선택이나 제자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낳은 결과이며 이를 오늘 복음은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때,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오자 예수님께서 갑작스레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신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배를 저어나가라고 하신 다음, 배에 앉은 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참 평온하고 온화한 풍경화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다음,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라!" (5,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미처 하지 않은 순간 예수님께서 무작정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치라’고 말씀하시니 무슨 상황이며 이 무슨 경우인가요? 밤새도록 동료들과 그물을 던졌지만 공교롭게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아침인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또다시 던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이를 어찌해야 한다말인가! 이 고장에서 태어났고 이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이 바다와 그물질하기 좋은 시간과 장소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로 피곤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낙심한 상태인 자신에게 웬 그물질! 그러기에 베드로의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5)라는 표현 속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네 경륜, 경험과 지식이 곧 자산이라고 할 만큼 베드로 역시도 자기 커리어career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대단했으리라 봅니다. 더욱 밤새도록 애썼는데도 이상 하리만큼 그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한 허탈감, 실망감으로 베드로의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대변하는 말 “애썼지만”(5,5)이라는 표현은 ‘나는 수고를 무척 많이 하였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보았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쳤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전라도나 경상도에서 욕봤다는 표현은 수고했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표현과 같은 어감입니다. 결국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아니면 사도직 활동 가운데서 겪는 피로감, 허탈감, 자포자기의 심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일 것입니다. 애써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나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자신에 대한 실망의 순간에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새로운 길로 초대하십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지금 바다에 다시 나가 그물질을 하는 것은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짓이니 저는 그만 집으로 가렵니다, 고 거부하고 돌아섰다면, 그는 평생 그 바다에서 어부로 끝날 인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살이에도 삶을 바꿀 기회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기회를 붙잡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나 봅니다. 이게 뭐지. 나의 판단으로 이건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과 생명을 느끼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피로감이나 부담감을 떨쳐 버리고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5)라고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아집이나 자존심, 경험과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선택과 결단을 향해 나가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인간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실망과 허탈 그리고 인생의 피곤함으로 힘들 때 베드로처럼 “스승님, 당신이 말씀하시니 제가 그물을 치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당신의 은총을 믿고서...” 마침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 곧 밤새도록 똑같은 바다에서 그물을 던졌던 그들에게 자신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니 그때 비로소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 올라타시고 배를 저어나가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5,8)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베드로의 말과 행위는 스승이신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승복이며 의탁이라고 봅니다. 이는 곧 사람들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은 상대적으로 인간의 죄 많음을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면 상대적으로 인간의 살아온 삶이 얼룩져 보이고 비뚤어져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백한 전 죄 많은 죄인입니다, 는 고백은 베드로가 상대적으로 타인보다 자신의 죄가 더 많다, 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베드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 많이 느끼고 깨달았다는 표현인 게지요. 하느님 자비의 거울 앞에 적나라하게 서 있는 베드로는 그러기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절감하면서 예수님의 대자대비하심을 체험했고, 그래서 그는 자기 동료들과 함께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라는 스승의 말씀에 힘입어 그분께 귀의하고 의탁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5,11) 것입니다.
이처럼 첫 제자들로부터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를 체험하였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온전히 회개하고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똑같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지 못하고 자비에 사로잡히지 못하면 우리는 온전히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투신할 수 없기에,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