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
---|---|---|---|---|
이전글 | † “내가 가르쳐 준 5단기도를 바쳐라.” [파우스티나 성녀의 하느님 자비심]. |1| | |||
다음글 | 9월 11일 / 카톡 신부 | |||
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9-11 | 조회수122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루카 6,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본당신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보좌신부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본당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성당에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20년이 지나서 안식년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순간을 감사드리고, 그 시간에 충실한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몇 해 전 은경축을 맞으신 어느 선배 신부님의 고백인데 그 내용이 마음에 참 와닿습니다. 정말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조건에 얽매여서는 안되지요. 우리는 ‘~만 하면 행복할텐데’라고 생각하며 특정 조건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지만, 막상 그 조건을 채우고 나면 행복해지는게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높은 수준의 조건들을 채우려는 욕심과 집착이 생깁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다음 또 다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이 나의 욕심과 집착은 점점 커져 무엇을 해도 행복하지 않고 무감각한 상태가 되지요. 내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이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렇기에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마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가난, 굶주림, 슬픔을 겪고 있더라도, 그런 일들을 겪는다는 사실 자체에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이겨낼 힘을 주시리라 믿으며 그분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르기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행복하여라’라는 선언을 듣는 이들이 지닌 특징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기준에 얽매여 사는 이들, 세상이 주는 풍요와 즐거움에 만족하며 안주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손길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지금 자기가 누리는 그것들이 계속 되기를 바라며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할 뿐입니다. 지금 자기가 행복하다고 착각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세상이 주는 만족과 풍요는 금방 ‘내성’이 생깁니다. 예전보다 더 가져도, 예전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도 그것이 주는 만족감과 기쁨은 점점 더 낮아지고 날이 갈수록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듯한 공허함과 헛헛함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기에 그들은 곧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는 이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를 편 가르기 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위로 덕분에 그 자체로 이미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부유한 이는 소유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넘어 존재의 삶을 지향해야 참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길을 안내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이며, 그 사실을 깨닫고 내가 받은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때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을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더 완전하고 충만한 상태로 누리게 된다고 알려 주십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