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반영억 신부님_「천상의 희망으로 시련을 감당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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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9-20 | 조회수8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시기까지(1요한4,10-12)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분의 사랑을 살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또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천상에서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는” 삶을 살기를 희망합니다.
한국 천주 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천상 행복이라는 미래의 확고한 희망으로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았으며 은총과 자비를 입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는 240년(1784년) 전 초기에는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고해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천상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신앙 선조들은 천상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어려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을 두고 지혜서는 예언하였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3,1-5).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 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감옥을 지키는 포졸이 감옥생활 안에서도 너무도 당당하고 평화로운 천주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그 감옥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웃으며 살고, 나는 돈까지 받으며 바깥에서 편히 있는데도 불평이 가득하다. 그러니 옥 속에 있는 그들이 죄인인지 옥 바깥에 있는 내가 죄인인지 모르겠다.”
신앙 선조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1791년 신해 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는 늘어갔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처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가 심할수록 믿음도 커갔고, 형제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자유를 줍니다.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240년 전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성당도 가까이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을 갖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세상과 타협도 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크게 구별이 없습니다.‘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 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신앙인의 모습은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추어지지 않으니 어떻게 믿는 이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합니다.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날이 안 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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