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 (마르9,30-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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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9-21 | 조회수2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1년 9월 19일 [연중 제25주일]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
복음(마르9,30-37)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더러운 죄를 대속하시고 의롭다 하시기 위한 구원의 복음인데, 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을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대속으로 힘없이 죽으시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등으로 내 뜻을 만족시켜 주시는 능력의 예수님만을 원했고 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가셨다’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가로질러 갔다’는 것은 사람이 어떤 계약을 했을 때 계약을 어긴 그 당사자가 자신의 죽음으로 어긴 계약을 대신하겠다는 의미로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라고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을 통해 공부했었다. 오늘은 예수님과 제자(우리)들의 계약이다.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버리고 따르는 것이다.
(마르8,34)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목표, 방식을 부인(否認)하는 그 버림을 뜻한다. 곧 육의 욕망을 위한 그 삶의 방식, 길을 버리고 영의 구원을 위한 길을 따르는 것이다.
(마르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 역시 배는 버리지 못하고 잠시 보관해둔 것이다. 목숨과 같은 배는 버리지 못하고 따랐던 것이다. 곧 자신들의 욕망을 버리지 못했고, 그 자신의 욕망을 위해 따랐던 것이다. 그래서 중풍병자와 나병환자, 그리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시고, 죽을 병을 살리시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 눈 먼 이를 보게 하신 그 능력의 예수님을 보며 자신들의 뜻, 욕망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따랐던 것이다.(마르10,35-41참조) 예수님과의 계약을 자신들이 파괴했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따랐던 것이다. 자신들은 자신(船)을 버렸다고 자신을 속이고, 속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세상의 것을 끊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겠다고 세례받았다. 곧 그분의 삶의 방식, 길을 따르겠다고 계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세상의 것을 구하려고 능력, 표징의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고 있다. 우리 자신의 뜻,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곧 예수님과의 계약을 파괴한 상태로 예수님의 뜻을 위해 따른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갈릴래아의 계약을 파괴한 제자들, ‘우리가 그 파괴된 계약을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그 죽음의 길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그 죽음의 길을 예수님께서 대신 가로질러 가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31절에 당신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신 것이다.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는 죽음과 부활이다.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요한6,39)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요한3,17)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자신들의 삶의 방식으로, 귀(耳)로 듣지 못해 두려워한다. 곧 말씀을 도덕과 윤리로 들으면 주님의 뜻, 그분의 용서를 알아듣지 못해 두려움만 느끼게 된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논쟁한다. 알아듣는, 깨달음이 없으니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섬기는 그 열심한 행위를 기준으로 논쟁을 버린 것이다. 깨달았으면, 알아들었다면 가장 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가장 크신 하늘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땅으로 오셔서, 그 땅의 존재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첫째가 되려면 곧 첫 아들, 맏이,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체가 되려면, 첫째, 머리 노릇을 했던 그 자신을 버리고 꼴찌가 되라는 말씀이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 어린이를 껴안으심- 누군가 돌보아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곧 먹이고, 입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어린이를 품고 하나가 되셨다는 말씀이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인 종의 자세로 힘없는 어린이 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늘의 생명을 받도록 말씀을 영, 생명의 양식으로, 또 그분의 사랑을 먹이고 입히는 그 돌봄을 하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말씀이시다. 그것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주님과의 계약을 파괴한 그 어린이 같은 나 자신을 보고, 인정하고, 오늘 말씀을 다시 먹고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할 수 있는 종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제자들,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 어린이를 품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가야 할 계약 파괴의 죽음의 길을 대신 지나가시고 계약의 삶을 살지 못한 너희를 내가 품었으니 그 사실을 깨닫고, 믿어 확신을 전하라는 오늘 말씀이신 것이다.
☨보호자 성령님! 올바른 깨달음으로 올바르게 기도하며 전하는 올바른 신앙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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