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43년 전 일본 나가사키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이내 저는 광주 화정동 피정센타의 피정 지도자의 소임을 받고 활동하면서 ‘성직자, 수도자 부모님 피정’을 지도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직자·수도자 어머님들의 모임(=현 광주대교구 농심회)이 결성되었는데, 제 어머니도 다른 교구 사제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모임에 참여하셨죠. 그런 계기로 다른 신부님들의 어머님들로부터 아들 신부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때론 함께 만나시던 사제의 어머니께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아들 신부의 환속 때문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제 어머니에겐 걱정 아닌 걱정이 생기셨고 그래서 늘 저를 위해서 사제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저로 인해 부모님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시고 세례를 받으셨지만, 참으로 열심한 신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시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는 바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더 심화시키면 성직자·수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이시겠지요. 수도자이며 사제인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수도자·성직자들은 부모와 가족들을 떠났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부모와 가족을 되찾은 것이라 봅니다. 흔한 표현으로 신부나 수도자보다 더 효자가 없다, 하는 표현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수도자나 사제에게는 영원히 부모와의 관계 이외의 어떤 가족이 없습니다. 형제도 자매도 결혼하면 다 자기 가족이 생기지만, 수도자에게는 참으로 남는 것은 부모님뿐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에게서 멀어졌지만,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께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었으며, 혈연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새롭게 부모님과의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젊은 날의 저에게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복음의 내면을 깊이 숙고하지 않은 저의 체험 부족과 연륜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첫 장면, 곧 어머니와 형제들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고”(8.19), 또 “밖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이 제겐 너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구도로 보자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어머니와 형제들은 가장 먼 밖에, 멀리 서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내용들 곧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과 주님의 말씀을 등불처럼 실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될 것입니다.”(8,15.18)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비추어 볼 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참된 가족 관계는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루카 사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 범주에 포함하려고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혈연적 관계이면서도 예수님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위치해 놓고 상대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의 중요함과 그 실행 여부가 바로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조건임을 이런 영적 원근법을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다시 오늘 복음을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님과 형제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아들인 예수님께 다가설 수 없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런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린 한 사람, ‘그 어떤 이’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8,20)하고 환기喚起시켜 드립니다. 어쩌면 그 ‘어떤 이’의 의도는 만나야 하는 가족을 만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예수님께 귀띔해 주었으리라 봅니다. 아마 우리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그 사람’처럼 했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런 생각 자체가 지나치게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인간적인 관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영적 관계를 여는 새로운 지평이며 이를 위한 포석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답변은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오겠지만, 신앙적이고 영적인 면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사실 성서학의 발전으로 성서의 중요한 영성의 본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이 따름의 요소는 떠남과 버림인데 이러한 추종 영성의 모범인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이미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선택과 주님을 잉태한 순간부터 ‘주님의 여종’으로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듣고 실천해 오신 분이셨으며, 그 순간뿐만 아니라 아드님 예수의 마지막 삶의 순간, 십자가 밑까지 동행하시면서 인간적이며 모성적인 측면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모질고 힘든 순간도 신앙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수용하고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표현은 역설적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칭송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이후에 이 말씀을 전해 듣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 어머니와 같이 인간적인 관계와 인습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강한 의향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단지 말씀을 들음으로만 듣지 않고 들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신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신자信者란, 곧 말씀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고, 말씀이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주님, 저에게도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계셨고, 그분들과 저는 혈연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하느님의 백성이며 가족이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