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6주일 나해,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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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9-29 | 조회수10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26주일 나해,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마르 9,38-43.45.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2천년여동안 이어져 온 가톨릭 교회의 역사 안에서 주님의 뜻을 더 철저하게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한 사람이 있습니다. 2세기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교부였던 오리게네스가 사제로서의 삶을 충실히 사는데에 성욕이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실행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지요. 주님과 더 철저하게 일치되기 위해 그런 열의를 보였으니 잘했다고 칭찬받았을까요?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부족함과 약함마저 고스란히 간직한 채 욕망을 절제하고 덕을 실천하여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만드신 신체 일부를 잘라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일이었기에 교회 내부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가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가 참으로 난감해지실 겁니다. 오늘은 그 말씀이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나왔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인 민수기와 복음에서는 흐름이 비슷한 두 가지 사건이 서로 비교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민수기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백성을 이끄는 모세의 부담과 짐을 조금이나마 줄여주시고자 그에게 주셨던 성령을 조금 덜어 백성의 원로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자 원로들은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예언’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모세의 지시에 따라 천막으로 나오지 않은 두 명의 원로에게도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호수아의 생각으로는, 모세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들을 따르는 일부 백성들이 모세의 권위에 순명하지 않고 사사건건 부딪히며 문제를 일으킬 것 같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 두 원로가 사람들 앞에서 예언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모세에게 간언하지요. 그러나 모세는 그런 여호수아를 제지합니다. 여호수아는 나름대로 모세의 입장을 생각하여 그런 주장을 한 것이지만, 모세의 눈에는 그것이 자기 ‘편’에 속하지 않은 이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시기하는 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자기 권위가 높아지는 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분 말씀을 알아들음으로써 그분께 속한 참된 백성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도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그분의 권능에 힘 입어 마귀를 쫓아내는 모습을 요한이 목격하고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려고 한 겁니다. 그러다 자기 뜻대로 안되자 예수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리며 은근히 그를 막아야 한다는 뜻을 드러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막지 마라고 하십니다. ‘우리 편’에 속하지 않은 그가, 자기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섬기지도 않는 그가 자기들과 똑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시기했던 요한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세력을 넓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 뜻을 따름으로써, 온 세상을 당신 품에 받아들이시어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니 편 내 편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과 같이 다니는 이들만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힘 입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비해, 예수님은 공공연하게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한다고 여기시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큰 견해 차가 생기는 것은 “우리”라는 울타리가 아우르는 범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우리’는 아주 작은 범위입니다. 나와 가까운, 나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나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소수만을 ‘우리’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그 밖에 있는 이들은 배척하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모습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우리’는 그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 범위만 넓은 게 아니라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경계’조차 희미하기에 누구라도 ‘우리’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있고 또 포함시키길 원하는 열린 모습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포괄하는 범위의 차이는 ‘죄’와도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하여 모두를 그 안에 품으시기에, 온 세상 모든 이를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시기에, 그들을 참된 사랑으로 대하시고 당연히 그들에게 죄를 지으실 일도 없지요. 그러나 ‘우리’의 범위를 나와 가까운 가족, 나와 뜻이 맞는 소수의 사람들로 한정하는 인간은 그 경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 무관심하고 적대시하며 심지어 상처와 피해를 입히면서도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 안에 속한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속하지 않은 이는 곧 ‘적’이기에 나와 같은 편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짓들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가 비난하는 불의한 부자들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당신을 믿는 작고 약한 이들, 하느님께서 당신 손에 맡겨주신 보잘 것 없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어 구원받을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으시지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말씀에는 그런 예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탐욕에 눈이 멀어 자기 몫보다 훨씬 더 많이 챙기려고 들면, 그로 인해 빈곤해진 형제들이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어 구원받지 못하게 되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대가로 엄한 벌을 내리시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만 담겨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이 스스로의 부족함 때문에 죄를 지어 ‘하느님 백성’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총과 복을 받아 풍족함을 누리는 이들이 기꺼이 자기 것을 베풀고 나눔으로써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켜주라는 권고의 메시지도 담겨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 너를 죄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인들은 그분 나라에 필요 없으니 죄를 지을 거 같으면 차라리 신체 일부를 잘라 버리라는 식의 냉혹한 경고 메시지만 담겨 있는 게 아닙니다. 나눔과 자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작고 약한 이웃이 하느님 백성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지켜내는 것처럼, 나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나 역시 주님께서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시는, 그래서 꼭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짜로 손이나 발을 잘라 버리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사악한 세력들이 하느님 뜻을 거슬러서라도 욕망을 채우라고 유혹할 때, 그 유혹에 나도 모르게 넘어가는 나약하고 안일한 마음을 단호하게 끊어내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생각보다 안일한 마음으로 죄악과 타협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번 한 번이라면 별 문제 없겠지’. 그런 마음이 우리를 죄의 상태에 쉽게 빠지게 만들고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상태에 익숙해져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손과 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빼 버릴 정도로 단호한 각오와 결심으로 죄악을 멀리하는 한편,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결국 사랑의 실천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셈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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