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루카 10, 25 ? 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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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10-06 | 조회수130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 어렸을 때,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 는 말을 듣고 자랐기에 먹기 싫어도 먹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먹기 싫은 것은 안 먹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라, 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했지만, 지금은 마음 가는 대로 싫으면 싫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의 오늘 복음,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다. 솔직히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우익단체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몇몇 친일 추종파들, 특히 주ㅇㅇ과 같은 사람은 정말이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욕설과 함께 분노가 솟구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고 말씀하시지만 그렇지 못한 저를 향해 예수님은 “모르면 책임이 없지만,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은 사람은 매를 더 많이 맞을 것이다.”(루12,48)하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0,25)하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에게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자신이 배운 바를 바탕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0, 27)라고 응답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 28)하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엔 루카의 명확한 편집 의도가 드러납니다.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앎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더욱 루카 복음사가는 율법 교사의 입으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참된 사랑의 실천 방법을 예수님께서 가르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시고, 이를 통해서 성경의 가장 의미롭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가 제기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이웃이란 통상적인 개념, 곧 서로 가까이 인접하여 사는 집,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뛰어넘은 새로운 관점에서 이웃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즉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서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발상을 전환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결국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도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가까운 곳에서 나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장소적 즉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지만 이를 넘어서서 지금 여기서라는 구체적으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이웃이며,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이 참된 사랑의 실천이라고 제시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이웃사랑이란, 지금 이곳(=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된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10,31.32)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라는 표현이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단지 사제와 레위 두 사람의 방향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내면의 상태와 행동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어떤 연유에서 그 사제는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 사제의 평소 의식과 행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제는 위급한 사람이 보이기보다는 “누구의 주검이든 그것에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민19,11)라는 율법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저처럼 가장 사제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참으로 자비하시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을 믿고 사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는 적합한 사람은 아닌 듯싶습니다. 레위인은 본디 성전에서 종사하는 사람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괜스레 복잡한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 또한 가엾은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마음보다는 머리가 우선하고 몸이 따르지 않았기에 못 본 척, 길 반대쪽으로 결국 오던 길로 지나가 버림으로써 스스로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이웃 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함으로써 이웃사랑의 실천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곧 사랑을 완성할 기회를 박차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의 반전은 바로 사제와 레위인과 달리 유대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인이 바로 초주검을 당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종교, 인종, 이념, 신분, 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바로 사마리아인처럼 지금 여기서 자신을 필요한 사람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베푼 것을 되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단 한 번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머물며 쉴 곳을 마련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이 온전히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돌봄으로 그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의 순수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마리아인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관계는 바로 예수와 상처받은 모든 인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흔히 소극적 구원과 적극적 구원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소극적 구원이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살려 내줌이라면, 적극적 구원이란 물에서 살려낸 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그에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에는 이런 복합적인 사랑을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역시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일 수 있고 또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건 우리 모두 아는 만큼 실천해야 하고, 실천하는 만큼 아름다운 세상, 사람다운 냄새가 풍기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서 나의 이웃은 누구이며, 그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고 동반하고 있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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