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회개, 환대, 관상”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참된 영적 삶을 살 수 있나?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참된 영적 삶에 대한 깊은 가르침과 더불어 깨달음을 줍니다. 네가지 측면에서 나눕니다.
첫째, 경청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귀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물론 성 베네딕도 및 모든 영성가들이 우선적으로 꼽는바 경청입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맨 처음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자들 역시 무수히 들어라 외칩니다.
대화나 상담의 기본도 경청이요 기도의 기본도 경청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 역시 경청해주길 바랍니다. 경청을 잘 하기 위한 침묵이요 경청에서 겸손도 순명도 뒤따릅니다. 침묵과 경청에서 참말도, 지혜도 나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삶의 지혜가 됩니다.
“조급하고 허망한 말을 피해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엄정한 말과 평안한 마음이 어우러질 때 덕은 완성된다.”<다산>
“대개 겉과 속을 함께 닦아야 그 덕이 외롭지 않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말을 해서는 안된다.”<다산>
이런 말은 깊은 침묵과 경청에서 나옵니다. 바로 경청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우선 주님의 발치에 앉아 침묵중에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새삼 침묵과 경청의 훈련을 통한 습관화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너무나 침묵과 경청이 실종된 경박한 세속화된 삶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개입니다.
경청과 동시에 일어나는 은총의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한두번의 경청이 아니듯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여정의 회개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예수님 발치에 앉아 경청하는 마리아는 분명 동시에 내면에서는 회개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반면 일에 몰두하면서 마리아의 모습에 불평하며 도움을 청하는 마르타에 대한 주님의 충언이 마르타는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도한 활동을 절제하고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경청의 관상을 우선하라는 회개의 가르침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제1독서 갈라티아서는 바오로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경위를 소상히 설명합니다. 진솔하고 겸손한 고백을 통해 사도의 회개의 여정을 듣는 듯 합니다. 예전 바오로가 아니라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종으로, 교회의 사람으로 거듭 난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환대입니다.
손님 환대는 기본적 영성이자 예의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정주영성과 함께 가는 환대영성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환대의 집, 수도자는 환대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환대의 기쁨, 환대의 사랑, 환대의 치유, 환대의 축복입니다. 서비스업의 첫째 요소도 친절한 환대입니다. 환대가 아닌 냉대(冷待)라면 그 상처는 얼마나 크고 오래가겠는지요.
오늘 마리아의 예수님 환대는 옳았습니다. 제 좋을 대로의 환대의 사랑이 아닌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른 마리아의 경청의 사랑,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마르타 역시 제 좋을 대로 정성 가득한 음식준비를 통해 주님께 대한 환대의 사랑을 표현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바, 환대는 아니였습니다.
환대에도 분별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내 중심의 환대가 아닌 주님 중심의, 상대방 중심의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불찰은 주님 환대의 우선 순위를 잊은 것입니다. 미사구조도 이런 주님 환대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로 말씀을 경청하는 환대가 우선합니다.
넷째, 관상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함께갑니다. 우열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요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경청의 관상이 우선입니다. 경청의 관상에서 삶의 중심과 질서가 자리잡히고 지혜로운 눈밝은 활동생활이 가능합니다. 경청의 관상없는 활동이라면 무질서하고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경청의 관상의 부재로 맹목적 눈 먼 활동에 지친 어리석은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입니다. 관상이나 활동의 본질은 사랑이요,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관계로 봐야 합니다.
바로 오늘 마르타의 좋은 취지의 음식 손님 접대의 문제점도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경청의 환대가, 경청의 관상이 우선임을 잊고 활동에 몰두함은 지혜가 아닙니다. 밖으로는 마르타의 활동이, 안으로는 마리아의 관상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관상에서 샘솟는 활동이어야 바람직한 영적 삶입니다. 예수님만큼 섬김의 활동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밤마다 관상가가 되어 외딴곳에서 관상의 기도로 아버지와 일치의 충전시간을 가졌습니다. 낮에는 활동가, 밤에는 관상가로 사셨지만 분리된 분이 아니라 통합된 온전한 분이었습니다.
잘 듣기 위해, 잘 분별하기 위해, 잘 기도하기 위해 일단 멈춤의 관상이, 침묵중 경청의 관상이 절대적입니다. 우리 삶에서 최고의 활동 형태가 하느님과 일치의 관상입니다. 참으로 이상적 영적 삶은 예수님처럼 “활동안에서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삶을 위한 네 요소가 경청, 회개, 환대, 관상이요 이 또한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영성훈련과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바로 이 넷의 요소를 통합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참 영성가로 살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여라.”(루카11,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