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참행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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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10-12 | 조회수121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
“아이는 세상에 나와 말을 익히고, 노인은 세상을 겪으며 침묵을 배운다.”<다산>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가면서 침묵의 경청이, 침묵의 겸손이, 침묵의 관상이 참으로 절실함을 깨닫습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을 세 번째 방문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35분동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서로 주고 받은 선물중 교황이 젤레스키 대통령에게 건넨 청동 주물에 꽃과 더불어 쓰여져 있는 글자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Peace is a fragile flower” (평화는 연약한 꽃이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연약한 꽃과 같아 다치기 쉽습니다. 참으로 정성을 쏟아 고이 다루어야 할 꽃처럼 평화도 그러합니다. 평화만이 아니라 사랑도 행복도 그러합니다. 값싼 평화가 없듯이 값싼 사랑도 값싼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니 평화도 사랑도 행복도 선택이자 정성을 다한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요즘 저를 행복하게 하는 수차례 인용했던 평생 좌우명 같은 짧은 시도 생각났습니다. 제가 평생 쓴 시들을 요약한 소원이 담긴 글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꽃을 평화로, 사랑으로, 행복으로 바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하루, 평화롭게 살자, 사랑의 하루 사랑하며 살자, 행복한 하루 행복하게 살자”며 각오를 새로이 합니다. 고맙게도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참행복의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청중은 매사 비판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청중으로 양분되어 있는 듯 합니다. 어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후 능란하게 대처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시종일관 목격한 어떤 여자가 군중속에서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
모든 어머니들의 공통적 소원을 드러낸 고백입니다. 예수님같은 아들을 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입니다. 또 하나 여자들의 간절한 바램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이란 말도 들은 적이 생각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의 행복, 어머니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능가하는 행복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의 참행복입니다. 한 어머니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참행복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루카11,28)
‘오히려’는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나를 낳아서 행복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마리아 성모님이 행복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믿는 모든이들에게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 삶이었음을 봅니다.
수태고지에서 순종과 더불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까지 늘 아드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예yes”로 일관했던, ‘비움의 여정’에 항구했던 마리아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이 성모님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순종의 믿음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부전자전이기 보다는 모전자전같습니다.
새삼 누구나에게 열린 참행복이요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삶이 바로 참행복의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선택과 노력에 따라 참행복의 꽃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며, 믿는 누구나에게 주어진 평생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행복을 살 권리와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 그대로 참행복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시편 1장도 참행복은 말씀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행복하여라,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1,2)
시편 119장은 176절까지 시편집에서 가장 긴 장으로 참행복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로 시작하여 176절 까지 계속됩니다. 새삼 말씀은 인간의 본질이요, ‘기도하는 사람’처럼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다음 시편의 고백도 이를 입증합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참기쁨, 참행복은 말씀을 듣고 지킴에 있는 인간의 복된 운명을 보여줍니다. 세상맛, 돈맛, 밥맛의 행복이 아니라, 말씀맛, 하느님 맛이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과 함께 가는 믿음이니 믿음의 기초는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을 통한 공동체의 일치임을 오늘 갈라티아서가 입증합니다. 다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갈라티아 교회 신도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6-28)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된 우리들이요, 이 믿음의 일치를 견고히 해주는 부단한 말씀의 경청과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말씀과 믿음의 공동체 성장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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