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1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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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1-03 | 조회수130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연중 제31주일 나해] 마르 12,28ㄱㄷ-34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저 신부가 갑자기 무슨 쌩뚱맞은 소리를 하나 싶으실 겁니다. 사랑이라는건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의 정체와 본질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기도 하지요. 그런데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남긴 말씀을 통해 사랑의 모습에 대해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고,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비극에 처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고,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 이 문장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겉모습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랑이 지향해야 할 실천이라는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에, 이를 통해 내가 손과 발로, 눈과 귀로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내가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적당히 설렁설렁이 아니라, 내 만족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그리고 진심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저 뜬구름 잡듯 관념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꼭 실천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나 구체적 계획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임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학자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처음에 모세에게 주신 계명은 열 가지 였습니다. 그 십계명 만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요. 그 계명을 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그 계명을 통해 실현해야 할 근본정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것들은 희미해지고,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데에만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겼다가 큰 벌을 받게될까 두려워 계명들을 어기지 않기 위한 규정들을 만들었고, 그 규정들을 어기지 않기 위한 또 다른 규정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어 나중에는 지켜야 할 율법조항이 613가지로 늘어났고, 그 중 무엇이 정말 중요한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인간이 만든 부수적인 부분인지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겁니다. 그래서 다른 ‘대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복잡한 율법조항들을 단순하게 압축해달라고, 그것들만 잘 지키면 하느님의 뜻을 어길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한 것이지요.
만약 그가 계명의 본질이 ‘사랑’임을 알았더라면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인지는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어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모두가 당신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려고 주신 게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셨으니 우리도 받은 그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의미인 것이지요. 그러니 ‘첫째 가는 계명’은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라’가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적당히 대충 할 수 없습니다. 내 기분 내킬 때만 선택적으로 할 수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크고 깊은 사랑에 비해 피조물인 내가 드릴 수 있는 사랑은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 것 없기에, 내가 받은 만큼 돌려드리지는 못해도 최소한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드려야 마땅하겠지요. 그러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지켜야 할 첫번째 필수조건이 됩니다. 한편 하느님을 사랑할 때 지켜야 할 두번째 필수조건은 우리 마음이 갈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양다리 걸치기’는 참된 사랑이 아니지요. 말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것들에 한눈을 팔아 마음이 갈라진다면 그건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닌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말고도 사랑해야 할 존재가 있습니다. 나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아까 분명히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니 뭔가 모순적이라고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웃사랑은 넓은 차원에서 보면 하느님 사랑이라는 큰 틀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하고 싶어도,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건 쉽지 않기에, 행동과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는 사랑은 금새 관념적으로 변해 옅어지고 흩어져 버리기에, 우리는 이웃에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꿩 대신 닭’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자 근거는 복음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무자비한 종에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은 부족하고 약한 우리가 당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음을 잘 아시기에 받은만큼 당신께 갚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당신께 받은 그 사랑이 ‘내리사랑’처럼 이웃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시지요. 그러니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로는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이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웃은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내가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내 양심에 비추어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도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 때는 ‘나’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방법이 좀 다릅니다. ‘내 나름대로’, ‘내가 느끼기에’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이웃을 제대로 사랑한 게 아닌 겁니다. 이웃사랑에서 나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은 ‘황금률’입니다. 즉 내가 남에게 받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건 이웃도 좋아할 수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그를 위해 양보해줍니다. 내가 싫어하는 건 이웃도 싫어할 수 있으니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배려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방법인 겁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이와 같은 원칙과 방법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아있지요.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한 당신 가르침을 슬기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 안에서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사랑이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사랑해야 할 이유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하느님 나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표는 하느님 나라의 정문 앞까지 가서 그곳을 구경하는게 아니라,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기에 아직 구원이 완성된 게 아닌 겁니다. 구원을 완성하는 마지막 한 가지는 바로 마음에 받아들인 사랑을 삶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천국은 사랑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그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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