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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과 신앙의 상관관계 생활묵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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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4-11-09 조회수59 추천수1 반대(3) 신고

 

만약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교리고 뭐고 다 필요없다. 그냥 하느님 열심히 믿고 이웃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내면 된다. 어디 성경 읽는다고 성경 지식 있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다. 만약 이런 말씀을 하는 신자가 있다면 이 신자의 말에 어느 정도 신뢰도가 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완벽한 답변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완전 무식이 철철 넘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전자의 내용은 준주성범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언급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은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준주성범에서는 그게 상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게 절대적이라면 굳이 성경을 볼 필요도 없는 것이고 머리 아프게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도 필요로 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어야 되는데 지금까지 교회가 그렇게 해 오지 않은 걸로 봐서는 분명히 성경을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는 표현이 다르지만 개신교 성경에서는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그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계명과 두 번째 계명,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사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도 합니다. 사랑 하면 사랑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국어사전에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가지고 모든 경우에 다 대입해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 어버이와 자식간의 사랑,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의 사랑(최근 유튜브에서 봤습니다.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시고 마치 부녀지간 같을 정도로 시부와 며느리의 애틋한 사랑), 연인 사이에서의 사랑, 군인이 나라를 지킬 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 사랑, 국토에 대한 사랑, 이 외에도 무수한 사랑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입니다. 경우에 따라 사랑의 감정도 다 다릅니다. 그럼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사랑도 그렇치 않을까요? 그냥 "나 하느님 무지 무지 사랑합니다" 한다고 해서 하느님을 엄청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천만예요. 입으로 사랑한다고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짜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어떻게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느낌으로 알 수가 있는 게 있습니다. 

 

가령 연인 사이라든지 굳이 연인이 아니더라도 서로의 눈빛으로도 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제가 남여 간의 사랑의 비유로 한번 설명해보겠습니다. 한 남자에게 사랑하는 연인이 생겼습니다.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냥 미모에 반해 사랑할 수도 있고요 또 한편으로는 미모는 아니지만 심성이 정말 천사 같아서 반해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진짜 사랑은 이 한계선을 뚫고 나갈 때 그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예시가 만약 그게 사랑이라고 전제를 한다고 했을 때 만약 이 연인이 어느 시점에서 여성에게서 치명적인 불치의 병이 생겼다고 가정을 한번 해 보죠. 이 남자는 여자가 건강했을 땐 모르겠지만 이젠 앞으로 이 여자 옆에서 거의 평생 병수발을 해야 될 상황이 생겼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이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성별을 떠나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남자가 이 여성분이 건강했을 때 자기가 자기 여자에게 한 행동이 진정으로 이 여자를 사랑했다고 자신한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설사 평생을 그 여자분의 병수발을 해야 하는 그런 운명이 닥친다고 해도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도량이 있다면 그 남자는 그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자기의 마음이 바뀐다면 그건 그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한 게 아니고 그냥 그 여자의 겉만 사랑했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모님들을 병간호 할 때 하는 말 중에 긴병에 효자 없다고 합니다. 

 

이 말처럼 만약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게도 그와 같은 말을 하는데 법적으로 부부로 맺어진 연인이라면 굳이 부모도 그러한데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이러한 추론은 보통의 사람들을 일반화 했을 때 일어난 경우를 상정해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렇다면 불가능한 일일까요? 물론 그런 상황이 된다면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고 하면서 자기 신세를 원망 아닌 원망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그런 연꽃과 같은 남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할 때 사랑은 단적으로 표현을 해 이와 같은 사랑을 했을 때 그런 사랑을 사랑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표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런 남자가 있다면 이 남자는 얼마나 이 여인을 사랑해야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이런 사랑을 하려면 처음부터 사랑하는 마음 자세가 달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자기 여자를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하는 불굴의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는 신자이기 때문에 신앙인에서 생각해본다면 물론 자기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기의 운명에 대해 자기 스스로 위로를 하는 측면에서 " 나 아니면 이 여자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와 맺어주셔서 나와 이렇게 인연이 되도록 하셨구나" 하는 식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 남자는 어떨 것 같습니까? 지금 자신의 현실이 물론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조금 극단적인 생각을 해본다면 그렇게 자신의 일생을 자신의 여자에게 병수발로 보낸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그런 삶도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가 당면한 현실 앞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을 겁니다. 단지 생각을 전환해야 합니다. 좀 더 신앙적으로까지는 할 필요가 없지만 신앙적으로 자신의 여자가 단순히 여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연인을 넘어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지체이고 또 예수님께서도 바오로 사도를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회심시킬 때 예수님 당신을 박해의 당사자로 여기신 것처럼 바로 자기 부인을 예수님과 같은 동일한 객체로 여긴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극적인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시고 주님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을 간호했다고 하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여인을 사랑하게 되려면 그게 말처럼 쉽게 될 것 같은가요? 쉽지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 매일 매일 우리는 그와 같은 거룩한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죄성을 씻겨내야 그게 가능할 것입니다. 수도 없이 그렇게 할 때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은 단순히 남여 한 부부간의 사랑을 빗대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마치 이 남자가 이 여자를 이렇게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하려면 그냥 입으로 사랑한다고 하거나 무턱대고 맹목적으로 사랑한다고 남발한다면 자기에게 조그마한 시련이 온다고 하면 금방 돌아서게 되는 그런 수준의 사랑밖에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알 때 나도 그 상대방에 대해 내 목숨을 줄 수 있을 만큼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사랑도 그럴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하느님이시니 우리 피조물을 사랑하실 거라는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거라는 그 사실만으로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람을 가늠한다면 그건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유한한 인간의 머리 속에 그 사랑의 한계를 가두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경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흔히들 다른 말로 표현해 우리를 향한 사랑의 편지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사랑의 편지를 거부하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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