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3주일 나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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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1-17 | 조회수64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33주일 나해, ] 마르 13,24-32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얼마나 높은 순위에 올라가는지,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지, 얼마나 ‘팔로워’가 많고 인기가 많은지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은 헤아리지 않은 채, 내 뜻, 내 일, 내 것, 내 사람을 신경쓰고 챙기는데에 온 정성을 기울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고 인생이 황혼기에 접어든 뒤에야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재물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마음 속에 자리잡은 불안함과 허무함은 가시질 않고, 힘이 떨어지니 제 몸하나 가누기조차 힘이 듭니다. 건강도 사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손 안의 모래처럼 다 빠져나가 버리고 나면 ‘대체 내 삶에 남은 건 뭘까’하는 회의감에 마음이 우울해지지요.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며 달려온 탓입니다. 삶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외면한 채 눈에 보이는 것들만 신경쓰며 살아온 탓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건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인생에서 중요한 일에, 특히 하느님 뜻을 따르는 일에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에게 남아있을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식별하고 가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종말’과 ‘멸망’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온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 곧 종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종말의 순간이 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 수명을 다하고 끝장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끝장나도 나는 남습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우리로하여금 맘껏 뛰어놀라고 만들어주신 ‘놀이터’일 뿐,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께서 당신 모습대로 지어만드신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물질적인 부분은 세상과 함께 사라질지 모르나, 나의 본질적이고 영적인 부분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세상의 멸망과 나의 종말을 같은 걸로 여기니 문제입니다. 욕심과 집착의 끈으로 세상에 나를 꽁꽁 동여매고는 무너져가는 세상과 함께 슬픈 결말을 맞으려고 드는 어리석음이 문제입니다. 세상은 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망해도 됩니다. 내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은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겪던 고통과 시련이 끝나는 때입니다. 두려워하고 슬퍼할 때가 아니라, 그토록 고대하던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임박했다는 설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있어 가장 슬픈 일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내 안에 있는 소중한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있을 것이기에, 내가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는 증거로서 하느님 나라에 가져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멸망이 임박했을 때 일어나게 될 공포스러운 환난과 재해에 대해 언급하신 후에, 당신이 ‘사람의 아들’ 즉 이 세상을 하느님 뜻에 따라 심판하실 분으로써 다시 오시는 ‘재림’이 이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천사들을 온 사방으로 보내시어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들을 불러모을 거라고 하십니다. 즉 ‘심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시려고 오시는 게 아니라, 멸망하는 세상에 있는 이들 가운데에서 당신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거룩하게 살아온,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데려가실 복된 사람으로 선택하신 이들을 구원하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멸망과 주님께서 시작하실 종말은 엄연히 다른 것이지요.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자기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종말의 순간을 기다리며 주님 뜻에 깨어있는 자세로 사는 이들입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도 모르는 종말을 막연히 두려워하며 회피하는 이들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종말인 것처럼 살아가는, 즉 지금 즉시 용서하고 지금 즉시 화해하며 지금 즉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지만, 적어도 주님 뜻을 따르는 그 일 하나만큼은 미루지도 후회할 일을 남기지도 않는 성실한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드시는 ‘무화과나무 잎사귀의 비유’에서도 종말의 ‘현재성’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눈으로 보기에도 죽음이, 멸망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면 종말을 준비하기에 이미 때가 늦은 뒤라는 것입니다. 나무가지가 뻣뻣해지고 잎사귀가 다 말라서 떨어진 뒤에야, 가을이 이미 다 끝나가고 겨울이 코앞에 다가온 뒤에야 추위를 대비하기 시작하면 너무 늦지요. 불시에 찾아온 된서리를 맞아 나무가 얼어죽고 말 겁니다. 그러니 나무가지가 부드럽고 잎파리가 무성한 한 여름에, 나무의 생명력이 넘치는 가장 좋은 시절에 겨울을 대비하는 것처럼, 내 삶에서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좋은 시절에, 죽음을 떠올리기 어렵고 하느님께 소홀해지기 쉬운 그 때에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지금 당장 하느님 나라에 데려가시기 위해 문 앞에 서서 기다리신다는 생각으로, 잘못한 것이 있다면 즉시 회개하고 주님 뜻에 맞는 일을 그분께서 나에게 맡기신 소명을 최선을 다해 실천해야 합니다. 나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언젠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종말이 어떤 식으로 완성될 지는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 뜻을 따르는 일에 온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나의 종말은 천국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면 연옥으로, 나중으로 미루고만 있다면 지옥으로 결론이 나겠지요. 그러니 주저하거나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는 ‘쇠뿔도 단김에 빼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말의 그 때와 시간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확한 때를 모르니 게으름 피우다가 한꺼번에 몰아서 준비할 수 없지요. 부족하고 죄많은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 뜻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사는 동안 내내 죽기살기로 노력해도 부족하니 벼락치기 같은 건 애시당초에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종말의 순간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며 그분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루카 21,36) 혹시라도 방심하여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으면 바로 그 때 종말이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으면 바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나의 종말을 결정하는 중요한 과정이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죽고 난 뒤에야 가는 ‘딴 세상’으로 여기면 평생 희망만 하다 끝날 수도 있으니, 지금 여기에서 그분 뜻을 실천하여 지금을 그리고 여기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쌓인 하루 하루가 모여 구원이 되고 천국이 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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