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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루카 18, 35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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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11-17 조회수76 추천수5 반대(0) 신고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15,14)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이 땅의 현실 상황을 두고 말씀하신 듯싶어집니다. 인도하는 눈먼 이야 어차피 눈먼 사람이니 그렇다고 하자고요. 문제는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는 데 따르는 사람은 왜 눈먼 이를 따르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며 살아왔는데 요즘의 세상을 보면서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따르는 자 역시 눈먼 이, 영적 소경이기 때문일 것이며, 결국 눈먼 이이기에 눈먼 사람의 인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따르는 사람 역시 눈먼 사람이기에 눈먼 사람의 인도를 받게 되고 결국에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신세가 되는 게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눈먼 사람을 예전에는 盲人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맹인을 파자하면 눈目이 망亡했다는 뜻이며, 눈이 망했기에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는 분명 그릇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흔한 표현으로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모르기에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며, 결국 보지 못해서 영적으로 눈먼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이 말까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다음엔 귀머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말소리는 들리나 말의 본질과 의미, 더 나아가서 참뜻을 헤아려 알아듣지 못한다면 귀머거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눈먼 이에게 광명을 되찾아 주신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배경이 되는 곳은 바로 예리고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던 예수님께서 그 도시에 당도하셨다는 소식을 어떤 사람이 눈먼 이에게(=마르10,46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18,37)하고 알려 주자, 그가 주저함이 없이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8,38)하고 부르짖음으로 예수님과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됩니다. 물론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본디 그는 태중 소경이 아니라 볼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언급이 없지만, 시력을 잃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은 표현 곧,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42.43)라는 언급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태중 소경과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시력을 잃었을 경우, 어느 쪽이 더 고통과 아픔이 더 클까, 라고 묻는 게 어리석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제 생각에는 후자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성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는 지금 상태에선 볼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지만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감각을 상실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하고 민감해지는 경우를 종종 심신 장애인들에게서 봅니다. 그는 분명 들을 수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로 울부짖음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은 점은 성서가 우리에게 신앙 곧 믿음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하는 감각 기관은 귀이며 귀는 청각 기능을 의미합니다. 귀는 곧 들음을 말합니다. 곧 구원은 들음에서 시작한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이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 바라느냐?”(18,41)라고 묻자, 그는 거침없이 즉시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물론 그에게는 아쉬운 것이 너무 많고 필요한 것도 너무 많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여러분에게 만일 지금 예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던지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시렵니까? 분명 예수님은 그 눈먼 이가 무엇을 필요한지를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한지를 아시지만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를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질문하시는 예수님과 대답하는 눈먼 사람 사이에 이미 내적 교감을 통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며, 이는 또한 그 한 사람에게 향한 질문이나 대답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따를 우리 모두에게 향한 도전이자 선택이며 믿음이라고 봅니다. 예수님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요14,6),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예리코의 눈먼 이는 예수님과의 만남과 예수님께 신뢰에 찬 믿음의 고백으로 이미 주님의 빛 속에서 생명의 길을 걷게 된 참된 제자이며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눈으로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었기에 그에게, 예수님은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42)하고 말씀하신 깊은 의도를 한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기적 사화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름과 보상”(18,28~30) 그리고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심”(18, 31~34)을 언급하셨지만,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다.”(18,34)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예리고 소경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참된 제자의 표상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의 마지막,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18,43)에서 잘 드러납니다. 

뜬 눈目을 가졌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 뜬 장님 곧 영적 장님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처음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볼 수 없을 때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볼 수 있었지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고, 들을 수 있었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했다는 사실이며 이런 상태는 결국 우리의 신앙의 현실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시력의 상실을 통해서 얼마나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고, 비록 부족하지만,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서 믿음을 고백하게 되고 제대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봐야 하는 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을 만나서 영적 소경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제대로 볼 수 있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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