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저 세상 부활을 이 세상 선행에서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루카 20,27-40) | |||
---|---|---|---|---|
이전글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루카 20, 27 - 40 | |||
다음글 |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 |||
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11-22 | 조회수45 | 추천수0 | 반대(1)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저 세상 부활을 이 세상 선행에서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루카 20,27-40) 주님 안에서 믿는 이들은 구원받아 부활할 것이라는 이 신앙은 가톨릭의 핵심중의 핵심일 게다. 우리가 부활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신앙은 단순히 죽은 신앙일 수도. 사실 못된 그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그래도 부활을 믿었단다. 부활은 믿음의 바탕이요 복음 그 자체이다. 부활 없는 믿음은 죽은 거고 복음도 거짓일 게다. 부활은 ‘삶’ 그 자체이리라. 예수님은 이런 사두가이들의 부활 신앙에 일침을 가하셨다. “저 세상에서는 더 이상 장가드는 일, 시집가는 일은 일체 없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온전한 사랑의 나라이기에 인간적인 에로스 사랑 따위에는 결단코 매달리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그곳에는 자신을 주위 모두에게 온전히 내어 주는 아가페 사랑으로 충만해 있어, 천사같이 되어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뜻이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체험하고 이웃 관계를 터득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확신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결단코 않을게다. 다행히 우리는 직접 체험하지 않는 것도 독서나 학습을 통해 우리 삶의 수준까지 이해시킨다. 또 그리스도인은 초월의 세계인 부활후의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 그러기에 이 하늘 나라는 삶의 질적 행복은 물론, 늘 ‘새 삶의 지평’을 열어 준다. 그렇지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 사두가이는 현세의 이 삶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짝 만나 시집장가 가는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는 과연 어떻게 정리되는지를 예수님께 따졌다. 사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 나라는 죽음과 악연 등의 고통이 전혀 없는 온전한 기쁨으로 충만이 된 세계일게다. 단순히 지상의 삶을 연장시키는 감동 없는 그런 모습은 결코 아니란다. 우리가 전혀 상상도 못한 완전히 새로이 ‘변모된 삶’이라나.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논리로 부활을 폄하하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서 더러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부활은 이론이 아닌 깨달음이다. 부활이란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육신의 조건을 그대로 가지고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란다. 그것은 완전히 변화된 육신으로 또다시 되살아나서 천사들과 같아지기에 더 이상 세상의 연에 매여 있지 않을 것이라나. 어쩌면 건전한 상식위에 건전한 신앙이 있단다. 이 세상 인연과 삶의 흔적으로 저 세상에서 이어짐은 상식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될, 이 간단한 걸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겸손해야 할 게다. 부활은 겸손한 마음이 되기 전에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죽은 이가 다시 저 세상에서 살아난다는 믿음은, 하늘의 힘이 끌어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를 게다. 겸손은 깨달음의 전제이기에. 이에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분명히 이르셨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한 하느님의 자녀이다.” 이 세상 살면서 부활이 뜻하는 것에 대한 정신의 눈을 밝히는 것이 신앙이다. 이렇게 우리는 어쩌면 철학자의 모습을 한 조각씩 간직한 채 산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을 통해 쌓은 행위들을 함께 지니고 부활한다는 거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루하루의 선행으로 영혼을 단련시켜 나아가자. 가슴으로 스미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또한 사소한 것에도 선행을 베풀며, 믿음을 단련시키자. 그러면 부활의 영광을 얻어 저세상 삶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