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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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11-24 | 조회수177 | 추천수5 | 반대(0) |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졸업정원제’를 채택했습니다. 입학 정원보다 더 많은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입학 정원의 30%를 더 선발했습니다. 신학생 정원이 80명이었는데 30%를 더 선발해서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입학 정원에 따랐으면 24명은 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를 포함해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성소(聖召)’가 있었다고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졸업정원제는 문제가 있어서 폐지되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는 경우 학생들은 졸업에 필요한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학업에 대한 부담을 가중하고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졸업 여부가 학문적 성취도나 역량보다는 정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 실력과 상관없이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생길 수 있어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군대에 갈 수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신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부담이나, 졸업정원에 들지 못할 걱정은 없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다른 이유로 사제 성소를 포기했습니다. 졸업할 때 이미 입학 정원이었던 80명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학 정원은 아닐 겁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졸업정원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이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인원수를 의미하기보다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144,000은 12(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12(사도들), 그리고 1,000(큰 무리를 의미하는 상징적 숫자)의 곱으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믿는 자들, 즉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 걸친 하느님 백성의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144,000명은 어린양 예수와 함께 서 있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로서, 영적으로 순결하고 하느님께 봉헌된 자들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 정결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4,000명은 우상 숭배와 세속적 유혹에 저항하고, 하느님과 예수님께 충성 약속을 지킨 이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혼란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킨 자들을 나타냅니다. 144,000명은 문자적인 인원수라기보다 하느님께 선택되고 구원받은 모든 신자의 완전성과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과부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과부가 아주 작은 돈이지만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부를 칭찬하신 겁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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