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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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09:59 | 조회수3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어제는 주일 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지 사항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본당은 한달에 한번 영적 독서를 소개 하는 시간을 갖는데 신부님이 수녀님을 소개 하시면서 이번달은 본당 원장 수녀님이 소개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이 올라 오셔서 소정의 책을 소개 하시는데 그 책을 선정하게된 배경에 대해서 말씀 도중 이 말씀이 있었습니다. 다음주 부터 교회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다음주 새로운 한해인대 새해가 무슨 해인지 아세요? 그 질문에 문득 떠오른 것은 내년이 대희년입니다. 25년마다 오는 대희년 말입니다. 대희년의 신학적인 의미는 공부해 보아야 겠지만 2000년도에 대희년에는 죄와 성찰을 주로 들은 것 같습니다. 그 말씀에 올 한해를 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진리와 사랑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면서 어느 때는 어두움을 맞이하게되는데 그런데 그 어둠에 빛을 밝혀서 들어가는 도중에 어둠과 심한 부딛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딛힘을 받는 사람에게는 상처일 수 있겠다는 것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참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절대로 그분이 밉거나 혹은 하대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진리와 사랑으로 접근한 것인데 받는 분의 입장에서는 간섭 혹은 지가 무엇인데 나의 인생에 들어와?? 절대 그런 것은 아닌데 말이지요. 그리고 본당에 신자들에게 신부님들의 묵상글을 나누는 과정 중에 많은 분들에게 눈총을 받았고 시샘 혹은 받는 분들의 인생에 관여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떼를 이루어서 저에게 공격하는 분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잠시 피해 있던 일도 있었습니다. 나름 진리와 사랑을 전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한것인데 그런데 받는 분의 입장에서는 저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아직 영적인 해안이 않되어서 그런것 같습니다. 더 집중해서 영적인 수양에 몰입하겠습니다. 영적인 해안이 명확히 열리면 나와 주변의 상황을 적절히 거리를 둘 수 있는데 아직은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주님 저의 영적인 눈이 더 선명히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주님께 청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이 사람들의 봉헌하는 모습을 보십니다. 그 순간 어느 과부와 바리사이의 봉헌을 보게되는데 바리사이는 격식이 있고 품위있게 자신이 가진 돈중에 일부만 봉헌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바리사이의 봉헌을 더 우아하고 품위 있게 볼 것입니다. 그런데 과부는 적은 돈을 가지고 있는데 그 돈도 모두 봉헌함에 봉헌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보기로는 참 어둔하게 볼것입니다. 아니 얼마 되지도 않되는 돈을 모두 봉헌하면 나중에 생활은 어찌하고 ? 그런 우려를 낳을 것입니다. 제가 열거한 것은 인간의 계산적인 사고 관점입니다. 그런데 그 관점이 성당안에서도 팽배해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세속화되었다고 합니다. 주님 관점으로 돌아가보면 그 과부의 헌금을 아주 높게 평가합니다. 그 과부의 봉헌이 예수님의 십자가 봉헌과 같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느님 영광을 위해서 봉헌 합니다. 희생합니다. 온전한 의탁입니다. 온전히 믿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 안에 나의 사고의 공간이 없이 오직 하느님 것으로 차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비움과 하느님을 향한 의탁, 믿음, 순명이 있기에 주님은 십자가 죽음의 봉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항목입니다. 바리사이와 같이 계산된 봉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온전히 투신 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겠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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