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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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5일 정도의 방황 끝에 한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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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5-02-02 조회수115 추천수2 반대(1) 신고

안녕하세요?  


지난 성탄 이후 어제 토요일 주일저녁미사 전까지 미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미사 전에 성사를 봤습니다. 13년 한 달 신앙생활 동안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죽기 전까지 이런 일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개종을 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신앙을 포기할까 하는 고민을 할 정도로 또 아니면 원래 어릴 때 집안이 가졌던 종교인 불교로 갈까 아니면 무신론자처럼 살까 하는 고민 등등 엄청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반 신자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니고 상처라기보다는 그냥 칼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영혼을 무참히 짓밟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고 또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차마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13년 남짓 짧은 기간이라면 짧지만 그렇다고 짧다고만 할 수 없는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가톨릭은 아니더라도 다른 신앙까지 포함하면 30년 조금 넘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순수한 가톨릭 신앙만 놓고 봐도 한때는 사제도 희망했었고 또 개종 후에는 수도자로도 남은 인생을 바치고 싶을 만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유야 어찌 됐든 그렇게 신앙생활을 나름 열심히 했다고 자부해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무너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까지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분을 성직자로 서품을 받게 하셨는가 하는 것에 대한 원망이 원인이었습니다. 성직자도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말을 누군가는 하긴 합니다. 그 말은 인정합니다. 이 말은 성직자분도 인정하는 말일 겁니다. 예수님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어떤 인간도 완전한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명제가 참이라는 전제 하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성직자라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넘을 수 없는 한계점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그런 지점이 있습니다. 그 마지노선은 그 어떤 환경이라고 해도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이 있는 것입니다. 그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입니다.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면 그게 무너지면 이미 사제의 신분을 상실한 것입니다. 교회 내의 교회법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그 여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인간 세상에 있는 공무원법에 품위유지 의무라는 게 있습니다. 마치 신앙 신앙 안에서도 가령 스님이면 스님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사제분들도 사제로서의 품위가 나와야 신자가 성직자를 바라보는 존경심이 우러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게 정말 현저하게 부족한 분도 극히 희박하지만 있긴 합니다. 지금 컴에서 작성하는 게 아니라 조금 불편하긴 합니다. 이건 비단 천주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 개신교 모든 종교 그나마 일반적으로 사이비라고 말할 수 없을 그 정도 수준의 종교에서라면 종교에서도 통용되는 불문율과 같은 것입니다. 


성사를 봤긴 봤지만 제가 신앙적으로 받은 상처가 치유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이건 많은 분들에게 어쩌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에겐 그냥 무조건 맹목적으로라도 순명하는 게 좋은 것입니다. 정의롭지 못해도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그냥 순명하는 게 편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진다고 표현하긴 좀 그렇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여쭤보는 것조차도 미움을 받게 되는 대상이고 신앙생활에서 블랙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도 순명이라는 말에 비추어 봤을 때 불순명하는 신자로 낙인이 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엄청 피곤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가령 냉담이나 신앙을 포기해서 나중에 하느님 앞에 갔을 때를 묵상해봤습니다. 그때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느님께 제가 신앙을 포기하거나 하느님을 외면한 이유를 그분들이나 여자 수도자님께 일정 부분 원인을 돌린다면 과연 하느님은 어떤 답변을 주실까 하는 묵상을 많이 해봤습니다. 


설령 원인이 그분들께 있다고 해도 하느님은 저의 손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다는 묵상을 해봤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땐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와 그분들과의 관계 때문에 하느님을 등진다는 것은 전적으로 제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설령 실제 그분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건 그분들과 하느님과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건 제 소관이 아니고 제 영역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건 하느님 소관이고 하느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원수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원수를 원수로 대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손에 진노의 대가를 맡겨야 한다는 것과 같은 원리일 거라 생각됩니다. 이론적으로도 이게 맞지만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실제 현실적으로는 수긍이 어렵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해를 좀 더 돕기 위해 범위를 조금 넓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올해 저희 교구 사제 인사 발령을 봤습니다. 두 분이 면직됐습니다. 두 분 다 저는 모릅니다. 어떻게 한 분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면직되는 경우는 여자 문제 아니면 잘 없는 경우로 알고 있습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근데 이분을 어느 정도 아는 분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여자 문제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통상 이해를 할 때 여자 문제가 아니면 면직될 일이 잘 없는데 이 경우는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번 이 일도 이 일로 알게 된 게 아니고 실제 작년에 11월 달에 전주교구에 윤지충 바오로 압송로 순례길 걸을 때 순례 담당 사목 신부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을 그때 신부님께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게 실제 제가 현실적으로 이번에 처음 본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말씀드리느냐면 다음 드릴 말씀을 이해하시려면 이 예가 적절한 것 같아 언급한 것입니다. 


가령 방금과 같은 그런 신부님이 사제로 계셨을 때 그 신부님이랑 어떤 문제가 있어서 이건 예를 든 것입니다. 문제가 있어서 제가 신앙을 포기했다고 하는 가정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상황이 어떤 상황이 된 것입니까? 이분은 면직이 됐지만 면직 원인이 본인 스스로가 원해서 면직이 된 것입니다. 자세한 원인은 모릅니다. 이런 걸 신학적인 설명으로 한다면 어떤 식으로 교회는 설명을 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서품을 받고 신부님이 되시면 보통 일반 신자들이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그런 신부님을 표현할 때 하느님께서 세우신 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적으로 판단해보면 하느님이 세우셨다는 표현보다는 신학교에서 원하는 과정을 이수했고 그 과정을 이수했을 때 특별히 서품을 받기에 흠결조건이 없다면 혹은 서품받는 데 결격사유가 없다면 주교님께서 서품을 주어서 사제가 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물론 이건 인간적인 표현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는 그런 것도 하나의 성령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이라고 표현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여지는 충분히 있지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상정해본다면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만약 하느님께서 세우신 분이라고 하는 표현을 빌린다면 하느님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결과로 설명이 되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사제가 되는 걸 미리 막으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리로 접근을 한다면 말입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젠 이런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의 전지전능함과 결부시킬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 누군가도 성직자와의 관계 때문에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처 때문에 신앙을 등진다고 해도 그 원인을 그 성직자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하느님 앞에서 그런 핑계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논리적으로 추론을 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불완전한 인간의 생각이기 때문에 맞는 생각인지는 모릅니다. 비록 인간의 판단이고 생각이지만 최대한 하느님의 시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보려고 한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두세 줄로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제가 상술한 내용이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런 결론을 말씀을 드리지 않는 이유는 많은 분들께서 스스로 제가 전해드리고자 하는 핵심을 이해하실려고 고민을 해보는 게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라 생략하는 것입니다. 


평신도는 을입니다. 을은 을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을은 갑이 아니기 때문에 갑의 위치에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무기평등의 원리처럼 실제는 갑의 위치에서, 동등하게 지위는 달라도 그 위치에서 표현을 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교회는 그걸 수용할 수가 없고 또 수용할 의지도 없습니다. 이 현실을 냉정하게 알고 수긍하고 받아들여야만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사과를 보고 배라고 하시면 실제는 사과라도 왜 그게 배인지 하고 여쭤보면 안 됩니다. 배가 아니라고 해서 아니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일단은 아니지만 '네'라고 대답을 하는 게 가장 현명한 처세가 될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면 그게 따지는 걸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신앙생활에 엄청난 시련이 있다는 걸 감수해야 합니다. 시련이라고 하니 이해가 좀 안 되실 것입니다. 성직자분도 사제이기 이전에 그런 상황이 되면 신이 아니기에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생각하고 그런 시각이 한번 고정화되면 그게 어떤 한 신자에게 고정관념으로 잡혀 무슨 일이든지 그 신자가 하는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어떤 일에서도 전혀 상관없는 일도 그 부정적인 생각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갈등 아닌 갈등이 거듭되고 그렇게 되면 그게 작은 시련으로 될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감수할 자신이 없으면 묵묵히 그저 어떤 상황에서도 "네" 해야 합니다. 이건 비단 이 부분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본당 회장단 같은 위치에 있는 사목위원도 해당됩니다. 만약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행위를 하면 이건 완전 이상한 신자로 취급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쉬운 게 쥐 죽은 듯이 조용히 백치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게 어쩌면 신앙을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현명한 신앙생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저의 이런 경험을 통해서 간접경험으로 저와 같은 경험은 하지 마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 걸 공유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굿뉴스에 글을 천개 조금 넘게 올렸습니다. 지금까지 올린 모든 글보다도 이 글이 가장 여러분들의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 내용이 단순히 제가 한 달 정도의 방황이나 마음 고생으로 나온 내용이 아닙니다. 이 시간 이전에도 이런 아픔을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 시간에도 고통을 인내하며 묵상한 시간도 있었기에 이 내용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신앙은 정말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어떤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제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도 그렇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말해야 무엇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누구도 자신의 신앙에 대해 자신만만해서는 안 되고 언제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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