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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봉헌의 축복, 봉헌의 여정 “영적 승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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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쪽지 캡슐 작성일07:47 조회수34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5.2.2.주일 주님 봉헌 축일(축성생활의 날)        

 

 

말라3,1-4. 히브2,14-18 루카2,22-40

 

 

봉헌의 축복, 봉헌의 여정 “영적 승리의 삶”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생활의 날입니다. 예수님 탄생후 40일째 되는 날, 마리아 요셉 부부가 아드님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친 날입니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 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의 법에 충실한 마리아, 요셉 부부였는지 깨닫습니다.

 

또 오늘은 자신을 특별히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2025년 희년과 ‘축성생활의 해’에 맞이하는 축성생활의 날이 참 각별합니다.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유아빠스는 “예수님 곁에 가까이 머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분에게서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사랑의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전 수도원을 자주 찾았던 어느 교구 사제의 “저에게 여기 요셉 수도원은 영육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찾는 영적 주유소와 충전소입니다.”라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은 믿는 이들 모두의 봉헌 축일이기도 합니다. 한두번 봉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살아 있는 그날까지, 봉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봉헌 축일입니다. 세상에 ‘봉헌’이란 말보다 아름다운 말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봉헌의 삶입니다. 

 

봉헌의 삶은 존엄한 품위의 맑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살아내야 할 봉헌 축복의 삶입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자유, 봉헌의 생명,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향기, 봉헌의 아름다움등 봉헌은 바로 믿는 이들의 삶의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 봉헌이란 말의 개념조차 이해못할 것입니다. 제대 앞 봉헌된 꽃처럼 우리는 모두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갑니다. 작년 후반기 많이 나누며 행복해 했던 ‘꽃’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봉헌의 삶, 바로 파스카의 꽃같은 삶입니다. 꽃 한송이를 선물하며 미안해 하던, 지금은 타계한 어느 자매에게 드린 덕담의 시도 생각납니다. 수없이 인용했어도 늘 새롭고 좋아 인용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하느님 눈에는 봉헌된 우리 영혼들이 다 그러합니다. 사실 주님께 봉헌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원초적 갈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봉헌 삶의 빛나는 모범을 여러분 발견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봉헌된 삶의 빛나는 모범이 바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예수님의 부모요, 성령의 인도따라 봉헌의 삶에 항구하다가 주님을 만난 시메온은 아름답고 품위 있는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여러분도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평생 봉헌 삶의 인도자와 보호자는 성령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다가 봉헌되시는 주님을 만난 시메온입니다. 그대로 다음 묘사대로 말라키 예언의 실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시메온과 함께 이 거룩한 주님 봉헌 축일 미사를 통해 봉헌된 주님을 만나, 정화되고 성화되는 영적 레위의 후손들인 우리들입니다.

 

“보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니 주님 마음에 들리라.”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을 만나 팔에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르는 시메온입니다. 이 시메온 찬가는 우리 가톨릭교회 모든 신자들이 매일 평생 끝기도 때마다 부르는 아름다운 찬가로, 이 찬가의 은총이 우리 모두 복된 선종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특히 첫절이 아름답습니다.

 

“주님, 이제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말그대로 시메온의 봉헌생활 축복의 절정 체험입니다. 시메온과 쌍벽을 이루는 봉헌 삶의 대가가 한나 예언자입니다.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살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한나 역시 봉헌 삶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봉헌 삶도 보고 배웁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친후 귀향한 마리아, 요셉이요,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하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대로 부모의 봉헌 삶을 보고 배운 예수님께 쏟아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세상에 봉헌의 축복을 능가할 축복은 없습니다. 아니 봉헌자체가 이미 축복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치유제도 봉헌 축복의 삶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유념할 사항이 있습니다. 봉헌의 삶은 늘 순탄대로의 평온한 삶도, 온실속의 따사로운 삶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시메온의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바로 이를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봉헌된 삶의 모범인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성인성녀들이 겪었던 무수한 고통과 시련, 고난을 생각하면 힘과 용기가 샘솟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든 봉헌 삶의 현장 중심에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이 자리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을 나누어 지니시고,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신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우리들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봉헌 삶의 중심에 이런 주님이 늘 살아 계시어 함께 해주시니,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어떠한 처지에서든 봉헌 축복의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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