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유혹을 끊어버려야만 나만의 새로움이 / 사순 제1주일 다해(루카 4,1-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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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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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3-08 | 조회수79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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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유혹을 끊어버려야만 나만의 새로움이 / 사순 제1주일 다해(루카 4,1-13) 흔히들 우리네 삶도 선과 악이 투쟁하는 싸움터란다. 그러기에 우리가 유혹에 걸려 넘어져 악의 편에 서면 결국 내적 힘을 잃는다. 그럴 경우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게 될 게다. 악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달리 없다. 광야에서 예수님처럼 오로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뿌리치는 것뿐이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바람직한 일은 아무런 유혹에도 뛰어들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이는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은 상태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악마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의 내용을 알렸다. 이어 그는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저 나라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께 주겠소.’라고 말하자 ‘성경에 기록된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고 그에게 대답하셨다. 다시 악마는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라고 말하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고 성경 내용을 답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세 번이나 유혹 받으셨다. 우리에게는 이게 위안이다. 예수님 유혹한 악마라면 의당 우리도 유혹하기에. 그러니 유혹에는 예외가 없다. ‘나는 왜 여태껏, 나만 왜 이 유혹에 시달리는가?’ 이런 분심 들면 그 모진 악마의 유혹 물리친 예수님을 떠올려보자. 유혹은 죄가 아니다. 사실 아무런 유혹이 없는 삶이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닐 게다. 소설 ‘죄와 벌’의 저자 도스토예프스키를 위대하게 만든 건 간질병의 고통이었고 ‘어린 왕자’를 쓴 셍텍쥐베리는 그를 일생 동안 대기 발령자로 평가 절하한 고통, 음악의 거성 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든 것도 끊임없는 여인들과의 실연과 청각 마비가 최대 고통이었단다. 우리는 악마가 예수님께 가한 유혹의 본질을 보았다. 또 그 마지막 막장까지도 유혹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의 처절한 모습도 보았다. 위대함은 그 고통의 유혹에서도 그것을 끝내 물리치는 것이라나. 흔히 믿는 이마저 유혹이 닥치면 얼마나 쉽게 포기하는지. 하느님만 신뢰하며 의지한다고 장담하던 이도 막상 시련은 못 이겨 유혹에 빠지는 약점 드러낸다. 우리에게도 믿음 없이는 도저히 못 거닐 광야들이, 한순간 눈앞에서 위협하리라. 칠흑같이 어둡고 질식할 정도로 꽉 막힌 암울한 시기에도,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끝까지 믿는다면서 은총과 믿음 더해 주길 간청하자. 고통은 불행이 결코 아닌, 은총을 안기는 번제물이다. 지금 지나치게 행복하면 어쩌면 불행일 수도. 뜨거운 불 속에서 아름다운 보석이 새롭게 빚어지기에. 이처럼 고통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게다. 그러기에 시련이 없다면 그것을 파악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실 삶에서 시련을 이해하듯이 우리 신앙도 불행에서 행복을 안기리라.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라고 복음은 알려 준다. 이 사순에 자신만이 겪는 유혹을 생각해 보자. 그게 예수님이 겪은 그 유혹에 감히 비할 소냐. 그분은 육신으로 가장 막장이라는 사십일 간의 그 고통에서도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우리는 광야서 그분께서 받은 그 유혹 상기하면서 나만의 새로움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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