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최후의 심판 마태오 복음 25장 개관 | |||
---|---|---|---|---|
이전글 |
광야.....그대를 용서합니다. |1| ![]() |
|||
다음글 |
빈첸시오 신부의 그림묵상 - 백 일흔 여섯 ![]() |
|||
작성자강만연
![]() ![]() |
작성일2025-03-09 | 조회수16 | 추천수0 |
반대(0)
![]() |
우리는 흔히 심판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앞설 것입니다. 일단 신앙 안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은 무학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그런 내용의 복음입니다. 세상에서도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 중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이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법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개별적인 내용 그 자체를 언급하는 것보다 다른 각도에서 한번 오늘 복음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흔히들 누군가는 오늘 복음을 너무 지엽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는 보편적으로 '최후의 심판' 이라고 명명합니다. 제가 왜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이 지엽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하느냐 하면 그 근거가 있습니다. 이건 성경에 있다뿐이지 성경 어디에도 그 마지막 장면의 한 부분을 묘사를 했을 뿐 이게 절대적인 심판기준이라고 그 어느 곳에도 명시적으로 밝힌 부분은 없습니다. 아니면 최후에는 이렇게 심판하겠다고 하는 단정적인 말씀의 표현도 없습니다. 이부분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생각을 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오늘 복음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근거를 논리적으로 반론을 제기한다고 한다면 분량이 엄청 많을 것 같아 그건 생략하겠습니다.
결론만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최종적인 상황에서 모든 걸 다 참작한 후에 일종의 정상참작의 사유가 될 것입니다. 또한 최후의 심판에서 흔히들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런 말을 하는 건 잘못됐습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아직 하시지 않았는데 마치 인간이 하느님이 이렇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사실 냉정하게 따지면 이처럼 무례한 행동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옹기장이 비유의 말씀은 성경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잘못 해석한다고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다만 성경 말씀에 비추어 그걸 합리적으로 해석을 해봤을 때 이렇게 하시지 않을까 하는 추론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느님께서 이런 추론까지도 허용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냥 맨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주실 필요도 없으셨고 아예 로봇처럼 그 어떤 판단조차도 허용이 되지 않게 창조를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성을 부여하신 것은 어떤 걸 그 이성에 근거해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봐야 하는 게 정상적인 판단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런 목적이 없으시다면 저는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비참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같은 존재인 인간으로부터 경외를 받으신다면 하느님의 존재 가치가 얼마나 형편이 없는지는 자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의 가치에 따라 하느님의 가치라고 말하기엔 표현이 좀 그렇지만 하느님의 존재가치가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주변에 있는 사람과 함께 평가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군인 왕과 또 훌륭한 재상이 있다면 과연 왕이 훌륭하니 그 밑에는 그에 걸맞는 신하가 있다고 평가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잠시 어떤 근거를 제시하다 보니 이런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잘못 간과하고 있는가 하면 간혹 가다가 보면 심판 때 마치 세상 법률에서처럼 상계를 하는 표현을 사용해 이야기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만약 하나의 악행을 저지르고 또 하나의 선행을 했다고 했을 때 심판이라는 말의 틀 안에서 주고받고 결산을 하면 수학적으로 제로가 되는 것처럼 말을 한다면 논리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여긴 심각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오류가 생길까요? 바로 선행은 선행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있어야 그게 진정한 존재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떤 죄나 악행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 역할을 한다고 하면 그게 어떻게 선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설령 겉모습은 선행인 것처럼 보여진다고 해서 선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 생각이 합리적인 생각인 것 같다고 동의가 되신다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일명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이 내용의 기준이 절대적인 심판기준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내용이 엄청 고민을 해야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오늘 복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때 마치 심판의 다른 요소도 있는데 이게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오도를 한다면 그럼 다른 그 어떤 행동이나 행위 같은 것 가령 예를 든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어떤 최소한의 규율이나 규칙 같은 것은 배제를 하려고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현상이 얼마나 모순이 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 부분을 강조한다면 어떤 결과물을 얻는 데에 그 과정은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절대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원래 사람이는 존재 그 자체는 어떤 행위를 해석할 때 일단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걸 절실히 체험을 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저도 나름 합리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사고를 하려고 노력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몰랐는데 작년에 어떤 계산을 했는데 그때 정말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의 입장에서 해석을 할 때 그게 자신을 위한 의도적인 해석이라는 것을 대부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제가 크게 느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합리적인 생각을 한다고 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어떤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완전한 인간이 아닌 이상은 그런 흠결은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걸 인정할 수 있어야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오늘 심판의 기준을 이해할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 이하의 것을 당연히 잘 이행한 후에 오늘 복음의 기준이 적용된다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 이 사실을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제가 쇼킹한 한 마디의 말로 표현을 하면 피부에 절대적으로 와 닿을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최후의 심판 때 하느님께 이런 말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시면 제가 오늘 언급한 이 모든 말씀이 명쾌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미사를 게을리 하긴 했지만 세상 일을 열심히 하면서 마태오 복음 25장에 있는 말씀을 언제 신부님이 강론을 하셨는데 계명 같은 것도 잘 지키고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얼마나 세상에서 살면서 작은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었는가 하는 게 심판의 척도가 된다고 해서 저는 그 말씀을 철떡같이 믿고 그냥 세상 살면서 제가 일해서 얻은 수입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으니 제가 미사도 궐하고 한 것은 다 이해해 주실 것이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래, 사랑을 많이 베풀었으니 오른쪽으로 가 천국의 유업을 물려받아라" 하고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은지 한번 묵상해 보시면 그냥 답이 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표현을 이해하시고 다시 한번 제가 오늘 올린 글을 보시게 된다면 처음 보셨을 때랑은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으실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