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1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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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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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8:04 | 조회수31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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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간 월요일] 마태 25,31-4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집필한 <영신수련>을 보면 “두개의 깃발”이라는 챕터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그 깃발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고, 그 주변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 깃발 아래에 모여 있으면 성공과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지요. 그러나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의 최후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다 결국 단절되고 마는 것, 즉 ‘지옥’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 깃발은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고 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엔 힘들고 괴로운 표정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 깃발 아래에 모여 있으면 고통과 시련이 계속될 것만 같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모인 사람들이 마주할 미래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친밀해지다가 결국엔 완전히 일치되는 것, 즉 ‘천국’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깃발 아래로 모여야 할 지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로 아는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건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 마음이 붙들려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 종말의 순간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오면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온 의인들은 당신 오른쪽에, 주님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욕망에 휩쓸리며 살아온 죄인들은 당신 왼쪽에 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 오른쪽에 서 있는 이들, 즉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서 있고자 노력한 이들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고, 그분 왼쪽에 서 있는 이들, 즉 사는 동안 ‘사탄의 깃발’ 아래에 서 있으려고 발버둥 친 이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으로 가게 되지요. 이 때 왼편과 오른편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심판의 기준은 ‘죄’를 지었는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주변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 즉 나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으면 하루 하루 살기가 버거운 어려운 이웃들에게 평소에 사랑과 자비를 얼마나 열심히 실천했는가에 따라 내가 영원한 삶을 누릴 장소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주님을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데, 그분은 어린이와 같이 작고 약한 이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실 정도로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주님과 특별하고 깊은 친교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시간을 내서 무료급식소에 봉사를 가면, 그곳에서 굶주림에 시달리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가출청소년 쉼터에 간식이라도 사서 가면, 그곳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떨며 사랑과 관심을 갈망하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민 가득한 마음을 안고 병실을 찾으면 그곳에서 매일 계속되는 십자가 고통에 너무 아파 신음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편견을 무릅쓰고 높은 담장을 넘어 교도소를 찾으면 그곳에서 깊은 후회와 절망으로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가 만난 주님으로부터 환대받지 못하면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괜히 왔나?’하는 생각에 상처받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찾아가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그분 마음을 열면 나를 괴롭히는 고통과 시련, 슬픔과 아픔을 이겨낼 힘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돌보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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