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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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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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3-18 | 조회수37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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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같은 경우도 중학교만 나와도 이게 무슨 말씀인지 다 알 수 있을 그런 정도의 복음입니다. 사실 이건 어쩌면 특별한 강론 같은 것도 필요 없을 정도의 복음입니다. 이 앞에 황금률 복음이 나오는 날 저는 핑계를 댄다면 그날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올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황금률 복음은 그냥 인간 사회에서는 상식과 도덕과 같은 것입니다. 상식과 도덕 중에서 그것도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고 도덕인데 거기서 또 뭔 설명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핑계를 댄다면 이런 핑계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보다는 좀 덜하지만 그래도 한번 묵상할 포인트를 고민해봤습니다.
저는 최후의 심판에서 꼭 보고 싶은 장면이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누구나 상상하는 그런 심판 말고 다른 것입니다. 흔히 신부님들 중에서 이런 강론을 하신 분도 계십니다. 많이 인용되는 내용입니다. 천국을 가면 놀라는 세 가지입니다. 천국에 갔더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있어서 놀라고 또 전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온 사람 이런 강론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표현에서 좀 더 하나를 기대하고 몹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선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 선생이라는 단어가 복음에서 의미하는 것은 어떤 뜻인지는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지도자다운 면모를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를 낮추어 마치 풍자하는 것입니다. 문학유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양반전 같은 풍자소설의 풍자일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자’의 의미는 ‘찌를 자’입니다. 마치 하층계급이 상층계급을 비난이나 비판을 직접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회해서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한 문학유형이 바로 풍자소설로 등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그런 유형의 풍자소설과도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특히 오늘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누구를 유심히 잘 봐야 할 것 같은가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자리는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법학교수나 아니면 법조인 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는 신학교 교수 등등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자기가 한 말과는 언행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모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다 그렇게 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요즘 세상의 세태를 잘 관찰해보면 쉽게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학자를 비유해 표현해보겠습니다. 학자도 진정한 학문의 길을 걷는 학자가 있습니다. 만약에 학자가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 때 학자의 양심으로 진정한 학자의 소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약 그렇게 말했다가는 불이익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기득권에 손해가 될 우려가 있다면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세상의 권력에 영합하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도 곡학아세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2000년 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현대판 이런 사람과 거의 같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선생이라는 신분은 지도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생은 선생으로서의 모습과 품위를 지닐 때만이 선생으로 대우를 해 줄 수 있고 또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선생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신분은 선생이라도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제가 비근한 예를 들겠습니다. 고등학교 모교에서 예전에 고문을 가르치신 분이 계신데 그분은 교감 선생님도 역임하셨고 국내에서 몇 번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탁월한 고문 실력을 갖추신 분입니다. 국어 선생님도 그분의 실력 앞에는 경의를 표할 정도입니다.
아주 연로하신 수학 선생님이 계신데 그분의 수학 실력은 일반 수학 교사와는 비교 자체를 할 수 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분이십니다. 근데 그분은 평소 말씀이 아주 거친 게 좀 단점입니다. 아무리 그런 말씀을 하셔도 절대 어느 누구 하나 빈정되는 말을 하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만약 실력도 없는데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애들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앞에서는 말을 못해도 완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선생이라는 위치는 인품도 훌륭해야 합니다. 그러면 금상첨화겠지만 그 정도까지 요구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언급한 내용과 오늘 복음 전체와 함께 조합해서 다시 간단하게 요약해 종합적으로 표현을 한다면 선생과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도 자신의 말과 행동, 언행이 일치하는 그 정도에 따라 그 지도자를 존경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 최소한의 품위는 있어야 합니다.
이젠 오늘 복음에서 제가 서두에 언급한 내용으로 다시 환원해 정리하고자 합니다. 제가 최후의 심판에서 기대하고 궁금한 게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 지도자로서 한평생 잘 걸어가신 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상급과 영광이 함께하시길 바라겠지만 그렇지 못한 길을 걸으신 분들은 이 세상에서 누렸던 그 지위가 그날에는 부끄러움과 수치의 날이 될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날에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평범한 그 말씀을 다시 새기시고 다시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 법도 신분범은 가중처벌하는 것처럼 그만큼 책임이 더 가중됩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최후의 심판에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교회를 위해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날에 그 직분을 잘 수행하신 분은 하느님의 영광을 잘 드러낸 사람이라 상급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직무를 태만하거나 유기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어떤 대가가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런 게 없다면 하느님의 공의가 거짓말이 되고 정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하늘나라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거라는 건 제가 굳이 복음 어디에 그게 있다고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교회 내 지도자라는 신분은 모든 사람이 다 해당될 수 있습니다. 평신도 회장도 될 수 있고 꾸리아 단장도 될 수 있고 다양한 위치에서 교회 내에서 앞장서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모든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 해당될 것입니다. 평신도라고 해서 제외되지 않을 겁니다. 왜 평신도도 해당이 되는지 자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평신도로서의 리더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이끄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중한 일입니다. 아마 평신도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사람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잘 한번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평신도도 이런 의식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느님 역사에 진정한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허수아비에 불과한 일만 하는 것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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