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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몸의 배고픔’보다 ‘사랑의 배고픔’이 더 큰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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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03-22 조회수43 추천수3 반대(0) 신고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강론>

(2025. 3. 22. 토)(루카 15,1-3.11ㄴ-32)

<‘몸의 배고픔’보다 ‘사랑의 배고픔’이 더 큰 고통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2-32)”

1) 25절의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라는 말은,

집에서 ‘즐거운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큰아들은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26절의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라는 말은,

집에서 무슨 잔치를 벌이고 있는지, 왜 잔치를 벌이는지를

큰아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상한 일인데, 표현만 보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온 것만 기뻐서 큰아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잔치를 벌이면서 들에 있는 큰아들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도한 일은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큰아들을

소외시킨 셈이 되고, 그것만으로도 큰아들이 화를 낼만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본래의

의도와 가르침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당연히 큰아들에게 알렸을 것이고, 잔치를 시작할

테니까 하던 일을 중단하고 곧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큰아들은 그 ‘기쁜 소식’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집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도 없었다가

무슨 잔치인지 모르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안 들으려고 해서 못 들었으면서도 “왜 나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느냐?” 라고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는 듣지 않다가

나중에 심판 때에 “나는 못 들었다. 나는 몰랐다.” 라고

변명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미사 참례를 하고, 똑같이 강론을 들었는데도,

강론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고, 딴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 강론을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분명히 눈으로는 글자를 읽고 있고,

손가락으로는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무엇을 읽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일에 대해서, “그는 그저

배가 고파서 돌아온 것뿐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비유의 전체 내용을 보면, 단순히 ‘배고픔만이’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이유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7절에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정신’이라는 말은 작은아들이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달았고, 뉘우치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배고픔’은 그가 그렇게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1절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그가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려고, 즉 밥을 얻어먹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면, 그는 ‘몸의 굶주림’보다

‘사랑의 굶주림’에 더 시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절-16절을 보면, 그는 ‘몸의 배고픔’도 심하게 겪었지만,

‘사랑의 배고픔’을 더 심하게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버리고 떠났던 그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것이 그의 회개입니다.

<큰아들은 ‘몸의 배고픔’은 실제로 겪지 않고 있었는데,

‘사랑의 배고픔’은 그 자신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3)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 모습에서 ‘사랑은 곧 기쁨’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큰아들이 화를 내는 모습은 ‘사랑 없음’을 나타냅니다.

‘화’는 사랑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실 때나,

위선자들을 꾸짖으실 때 화를 내시는 것 같은 모습을

접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화’가 아니라 ‘안타까움’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화’와 ‘증오심’만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그들 마음 안에 사랑이 없었다는 것도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에서, 자기들만의 신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랑은 볼 수 없고, ‘화’와 ‘증오심’만

가득한 모습을 볼 때가 많은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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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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