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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율법은 내 영혼을 지키는 보루와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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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5-03-26 조회수49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도 보통 때보다 간략하게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세상 법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교양으로 법철학을 들었습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법이라는 건 왜 필요할까요? 언젠가 한번 올리겠습니다만 법 없이 살아도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할 때가 있습니다. 이건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습니다. 대개가 다 좋은 표현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쁘다의 의미는 실제 나빠서가 아니라 법이 더 잘 보호를 할 수가 있는데 법이 없다면 이 사람 같은 경우에는 나중에 없어서 피해를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나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필요할 땐 든든한 보호막이 될 수가 있었는데 그게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없으니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법이라는 게 없어도 괜찮은 게 아니겠죠. 있었더라면 자기를 지켜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에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이게 잘 복기가 되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기본 맛보기 정도입니다. 나중에 그 내용을 복기를 한다면 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고 왜 필요한가를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개념입니다. 

 

지금 그걸 결론은 알고 있는데 설명을 당장 해드릴 수가 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제가 나중에 어떻게 자료를 찾게 된다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법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게 구속이 될 수가 있고 또 아니면 자유를 줄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구속이란 말의 뜻은 매이게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강학상 의미입니다. 감금의 구속이라는 그 의미가 아닙니다. 법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교도소 안에 죄수와 교도관 둘을 비교해보겠습니다. 교도관은 직업상 있습니다. 자기가 근무 시간만 교도소 안에 있습니다. 만약 오전 근무를 하는 교도관이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물리적인 개념으로는 갇혀 있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각 사람의 심리를 본다면 심리도 똑 같이 갇혀 있다고 생각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간적으로는 갇혀 있는 상황은 동일하지만 죄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 마음도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교도관은 자기가 공간은 페쇄 공간이라도 자기는 죄를 지어서 갇혀 있는 게 아니고 직업상 그곳에 있기 때문에 마음은 갇혀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환경인데도 상황은 다릅니다. 

 

이 상황을 복음에 비유를 해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율법과 계명이 마치 공간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을 구속하는 장소의 의미처럼 제한을 하는 감방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언급한 구속의 의미는 말 그대로 구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라는 건 같은 단어이지만 여러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 미세한 차이를 잘 이해하셔야 되기 때문에 제가 부연설명을 드린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게 얽매이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는 죄수의 경우가 될 것입니다. 이건 감금이라는 의미의 구속입니다. 

 

하지만 교도관 입장에서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죄수처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형태는 갇혀 있는 게 동일하지만 자기는 죄수처럼 죄를 지어서 갇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죄인에게 가하는 구속(감금)이라는 개념에서 탈피된 개념인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그 자체만의 액면적인 말씀으로만 해석을 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법이 미완성인 상태로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도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달리 바라보면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보면 보완, 보충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나중에 결론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오늘 복음에서 또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후반부에 있습니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자의적으로 교회의 법규범을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쉽게 말해 쫀쫀하게 이런 걸로 우리에게 벌을 주시겠느냐 하는식으로 말입니다.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시고 봐주시겠지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절대적으로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자칫 잘못하면 이런 사고에 매몰돼 있으면 큰일이라고까지는 말하긴 어렵지만 영혼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 후반부를 잘 해석하면 답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법과 계명이 우리를 옭아매는 존재로 있기 위해서 법을 완성하시려고 하신 게 아닐 겁니다. 어떤 결함이 만약 그 결함 때문에 이 결함은 결여 즉 법이 없는 무법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면 제가 서두에 말씀해드린 것처럼 보호를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보호는 영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우리에게 율법과 계명의 존재 의미를 제시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결국은 율법과 계명은 우리의 영혼을 구속(얽매임)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보루와 같은 성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오늘 복음은 한결 이해가 잘 될 수 있으리리 봅니다. 어제도 여중생이 제 자리 옆자리에 앉았고 제가 10시 반 경에 피곤도 하고 해서 그만 집에 돌아왔는데 저보다 더 책을 보고 갔습니다. 

 

마지막에 짐을 정리를 하면서 봤는데 열심히 공부를 하더군요. 이 여학생을 보며 정말 깊은 묵상을 한 게 있습니다. 이 내용을 집에 와서 올리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 올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상상하지도 못할 중요한 내용을 묵상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쯤에 한번 올리겠습니다. 이제 이 아이의 입장에 제가 빙의된 상태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그런 내용을 묵상한 것입니다. 정말 유익한 묵상인 것 같습니다. 기대해보셔도 괜찮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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