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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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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5-03-30 조회수37 추천수3 반대(0) 신고

[사순 제4주일 다해] 루카 15,1-3.11ㄴ-32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부모님은 자녀들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실까요? 바로 ‘기다림’을 통해서입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해도, 수많은 실수와 잘못들로 당신을 걱정시키고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도, 결국은 올바른 길을 찾아갈 거라는 믿음으로, 언젠가는 당신 마음을 알아주리라는 기대와 바람으로 묵묵히 지켜보시며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아들들을 그렇게 믿고 기다려 주십니다. 아들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 당신 탓이 아님에도, 그들이 당신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미움과 원망의 마음을 내려놓도록, 그렇게 본인들을 향한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고 다시금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끝까지 기다려주시며 자비와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겁니다.

 

먼저 작은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그는 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 덕분에 안정적인 삶의 터전에서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면서도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더 신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아버지가 자신을 답답하게 구속하여 그러지 못하는 거라고 여겼지요. 그래서 언제나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기를 바랐고, 어느 순간 그 바람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아버지께 이런 청을 합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본인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을 챙겨간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로부터 ‘가불’받은 것은 ‘유산’, 즉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에나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었습니다. 그걸 먼저 달라고 청하는 것이 얼마나 철 없고 무례한 짓인지 헤아리지 못했던 겁니다. 그렇게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났으면, 본인이 바랐던대로 자유롭게 기쁘게 잘 살았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미래도 삶의 목표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눈 앞의 쾌락만 쫓으며 자기가 받은 재산을 펑펑 써댔고, 금새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지요. 그리고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유다인들이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는 돼지들의 수발을 드는 비참한 처지가 됩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연줄이 끊어진 ‘연’과도 같습니다. 아버지라는 ‘연줄’이 없으면 더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줄 알았는데, 막상 연줄이 끊어지자 세상의 거센 풍랑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마구 휩쓸리다가 결국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 것이지요. 그제서야 그는 깨닫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답답하게 구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단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지켜주는 버팀목이었음을…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다음으로 큰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큰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랑 같이 못살겠다며 집을 뛰쳐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만 아버지 곁에 있었을 뿐 마음으로 함께 하지는 못했지요. 동생이 그랬듯 아버지 곁에서 큰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저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건 참고 하기 싫은 건 억지로 해야한다고 여겨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그런 희생과 노력을 하니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바람대로 되지 않자 오랜 시간 동안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자기가 뭐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즐길 ‘염소’ 한 마리만 주셨으면 됐는데, 그 소소한 바람조차 알아주지 않은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그럼에도 꾹 참고 티내지 않으며 아버지 곁에서 묵묵히 일해왔던 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그 재산이 다 자기 것이 되니, 그 때 가서 그동안 참았던 욕망들을 다 이루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으로 온갖 욕망을 실현하며 방종하게 살다 온 저 얄미운 동생놈을 탓하고 혼내시기는 커녕,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너무나 서운하고 화가 나서 그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맙니다. ‘난 지금껏 종처럼 당신 말에 복종하며 일만 했지 단 한 순간도 당신 아들로 산 적 없다’고, ‘당신과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 나에겐 정말 지옥 같았다’고, ‘그런데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 공정치 못한 처사를 하는 당신이 정말 밉고 원망스럽다’고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겁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그를 말리고 싶었고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 녀석은 아직 그렇게 큰 재산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음을, 미성숙함과 무절제로 인해 결국 모든 것을 잃고 큰 절망을 겪게 될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냥 떠나보낸 것은 그만큼 그를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든 작은 아들은 마치 럭비공과 같아서 억지로 붙잡으려 들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나가 관계가 아예 끊어질까 두려웠습니다. 젊은 시절 자신이 그랬듯, 집 나가서 고생 좀 하다 보면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달을 거라 기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의 철 없고 무례한 모습에 화를 내지도, 어떻게 살아야 한다며 시시콜콜 충고를 하지도 않고, 그저 믿고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잘 지내기를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그 녀석이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산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괜히 죄송스런 마음에 밖에서 방황하지 않기를, 어서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작은 아들이 저 멀리 오는 게 보이자 버선발로 마중나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맞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한 기쁨도 잠시, 이번엔 큰 아들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내가 믿고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주었는데, 적어도 큰 놈 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줄거라 생각했는데, 한 순간도 내 아들로 산 적이 없다니, 내가 그렇게나 밉고 원망스러웠다니, ‘나는 대체 그동안 뭘 한 걸까’하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너는 왜 애비 마음을 몰라주느냐’고 큰 아들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들이란 놈이 어떻게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그를 혼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테니까요. 오해와 상처로 인해 큰 아들과의 관계가 영영 끊어져버릴 테니까요. 지금 이 순간 아버지로서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진심을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담아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오늘 복음 속 비유의 핵심 주제는 ‘화해’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신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우리들과 화해하기를, 그렇게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얼마나 바라시며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사실 지금 내 모습이 작은 아들에 가깝든, 큰 아들에 가깝든 그런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지어 당신으로부터 멀어져도, 혼자만의 오해와 착각에 빠져 당신을 원망하며 차갑게 등을 돌려도,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주시고 큰 자비와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분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자녀로 살아가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온 마음으로 함께 있다면, 그분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고 그분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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