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24,50~51)
주님 승천 대축일을 축하합니다. 오늘 승천에 관한 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은 많은 유사점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루카 복음에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24,50~51)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또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1,9)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승천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슈퍼맨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들리지만 승천의 본뜻은 육체를 지닌 인간 예수님이 영적 존재인 하느님의 위치로 복귀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불완전한 인간의 위치로 내려오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강생의 목적을 성취하셨기에 본래의 자리, 제자리로 돌아가신 것이 바로 승천의 의미인 겁니다.
전례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昇天을 분리해서 기념하고 기억하지만, 실은 부활과 승천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사실 구약에는 이미 승천하신 분들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에녹의 승천에 관해서,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 가신 것이다.”(창5,24)라고 신비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신 것”(요16,28)입니다. 이는 우리네 정서와도 비슷합니다. 승천은 곧 하느님 계신 곳으로 귀천歸天이며,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歸鄕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승천은 바로 부활과 다른 시선에서 동일한 신비를 다르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승천을 오늘 화답송의 후렴은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시47,9)하고 표현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천사와 대천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하느님의 영광 가운데, 하느님의 오른편에 좌정하심을 축하하는 기쁨과 환희를 연상하게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신 홀로 하늘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뒤따라 올라갈 우리가 머물 거처를 마련하러 하늘에 오르신 겁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우리 미래의 희망이며, 미래에 올라가야 하는 하늘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나라에,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본기도)라고 우리의 바람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원죄로 말미암아 굳게 닫혔던 하늘 문이 예수님의 승천으로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이미 하늘은 열렸지만, 아직 우리에겐 열리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1,1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 자리를 마련하신 다음, 우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에,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께서 남긴 유언을 기억하고 삶을 통해 증언하고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선,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라는 약속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예수님은 교회 곧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디서나 언제든지 늘 우리와 함께 계실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존재 방식인 영적 현존을 깨어 의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열린 눈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은 순간은 한순간도 없습니다. 떠나셨지만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24,47)하는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바로 구원의 출발점이며 도착점인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자리에서부터, 아니 자기 자신부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파스카 삶의 생명력이며 역동성입니다. 자기의 죽음이 전제되고 자신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만이 참된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24,51) 주님의 강복이 없이는 우리 힘이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증인의 일을 우리게 맡기시면서 우리의 능력만으로 불가능하기에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주겠다.”(24,49)라고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기에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복음의 증인으로서 역할을 담대하게 굳건하게 수행할 수 있었으며 오늘 제2 독서 에페소가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1,17~19) 이러한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이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지냈다.”(24,53)라는 복음의 표현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본보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그 자리엔 분명 주님께서 함께 하셨을 것이고, 함께 기도하면서 제자들은 서로 끈끈하게 주님의 현존으로 결합되고 연결되어 감을 피부로 체험하면서 더욱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점차 확대되어 가고 지속되어 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당신이 떠나셨던 자리로 되돌아가신 예수님, 우리는 더 이상 인간적인 눈으로 그분을 볼 수 없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믿음의 눈과 영의 눈으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현존을 체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 집에 머물 때까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가야겠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당신의 수도회 규칙서 ‘겸손’의 장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자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려오셨기에 오르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내려와야, 겸손해야 만이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속에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 또한 하늘로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교부 오리게네스 또한 이렇게 말였습니다. “그대가 하늘이고 그대가 하늘로 간다.”라고.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들이나 사막의 성자들, 수도자들은 모두 이와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 라고 믿으며, 우리가 하늘이라는 소중한 믿음을 안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늘의 하느님을 모시고 있으면 우리가 하늘이다.” 이는 곧 우리도 주님처럼 이제 이 땅에서 우리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자리에 맞는 존재로 살아가는 게 승천을 살아가는 존재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 (복음환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