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6월 11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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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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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11 | 조회수184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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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난관과 시련 가운데서도 바르나바 사도의 태도는 일관되게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이어갈 직제자들인 사도들을 선택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선택 기준과는 사뭇 다릅니다. 누구를 뽑아야 하나, 우리는 즉시 머릿속에 답이 있습니다. 스펙이 좋은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 배경이 좋은 사람, 친화력 갑인 사람...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달랐습니다. 당시로는 무장독립투사였던 열혈당원을 제자단에 가입시켰는가 하면 친일파이자 배신자, 매국노인 세리도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진중하고 헌신적인 사람을 사도로 뽑으셨는가 하면, 좌충우돌에 모난 돌 같은 사람도 사도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최일선에 섰던 박해자 바오로를 사도로 선택하는가 하면,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 바르나바를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르나바 사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행전 11장 24절) 사도행전 1장 24절을 통해 우리는 배반자 유다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 한명을 뽑는 과정에서 최종 결선까지 올라갔다가 탈락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르나바는 사도들의 제비뽑기에서 탈락해 열두 사도단에 들지는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성심성의껏 그리스도교 전파에 투신합니다. 그 결과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로부터 바오로와 함께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함께 열두 사도들에게 소개되었고 그들의 동역자가 됩니다. 특별히 바르나바 사도는 안티오키아 지방 복음화에 1년 이상 헌신하였고,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습니다. 특별히 바르나바는 회심 초기 바오로 사도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그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박해에 워낙 앞장섰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아무리 그가 크게 회심을 했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그런 순간 바르나바는 정성껏 그를 보필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집회에 그를 모시고 가서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는 아주 끈끈한 우정관계가 형성되어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도 동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 사촌동생 마르코를 선교팀에 포함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바오로 사도와 견해를 달리하게 되어 결국 바오로 사도와 갈라서게 되어 마르코 복음사가와 키프로스로 돌아오게 되지요. 교회 전통에 따르면 바르나바 사도는 로마, 밀라노 등지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기원후 63년경 키프로스섬 살라미나에서 유다인들의 돌에 맞아 죽음을 통해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바르나바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복음 선포 과정에서 직면한 숱한 난관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의 태도는 일관되게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는 노골적인 적개심, 그리고, 추방 앞에서도 항상 당당했고 기뻐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의 삶 한 가운데 늘 현존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와 삶, 지칠 줄 모르는 복음 선포 열정에 큰 감동을 받은 수많은 이교도들이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심초기 유다인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당하던 바오로 사도를 끝까지 지지해주었으며 그의 복음 선포 사업에 성심성의껏 협조함을 통해 초기 교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6월 11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영국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은 피험자들에게 신문을 나눠주고 빠른 시간에 신문 안에 있는 모든 사진을 세어 보게 했습니다. 대다수의 피험자는 사진의 수를 세는 과제를 완료하는데 약 2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일부 피험자는 다시 검산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는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신문 두 번째 페이지에 뉴스 기사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던 것입니다.
‘그만 세어 보세요. 이 신문에는 사진 43장이 있습니다.’
이 제목을 본 피험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검산하기 위해 다시 신문을 본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만 세라’는 제목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만 세라’는 제목이 있었다고 말하자, 자기가 얼마나 꼼꼼하게 봤는데 그런 제목이 어디 있었냐면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한 탓에 대부분의 피험자가 볼 수 없었고, 결국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할 방법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열린 지각을 가진 사람만이 이 문장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을 일상 삶 안에서 보지도 또 느끼지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함께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기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님께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떠나는 데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도구로 쓰시도록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자신이 받은 은총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고, 주님께 집중하는 것임을 밝히십니다.
열린 지각을 가지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알베르트 슈바이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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