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구원을 방해하는 것들은, 버려야 할 ‘쓰레기’일 뿐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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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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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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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7-16 | 조회수49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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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좁은 뜻으로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처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세속적인 처세술에 능했던 사두가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넓은 뜻으로는 인간 세상의 기득권층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철부지들”은, 좁은 뜻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도들과 신자들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인간 세상의 소외계층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의 소외계층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는 것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받는 것이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교만한 기득권층 사람들도 회개하고, 교만을 버리고,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다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2)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구원이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3) 만일에 구원이라는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부자들만 구원을 받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고, 그냥 ‘돈의 나라’일 뿐입니다. 만일에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적으로 머리가 좋고 학식과 학력이 많은 사람들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울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구원을 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의 놀이터일 뿐입니다. 만일에 구원이라는 것이, 권력을 많이 가진 자들이 권력으로 얻는 것이라면, 힘없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그런 구원을 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고, 희망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똑같이 행복한 나라,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 부유한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나라,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는 나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천사들과 같아져 있는’ 나라입니다(루카 20,36).
4) 가장 높은 곳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이고, 죄 없으신 분께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것은 죄의 억압에서 인간들을 해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받으려면 인간들 쪽에서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바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은, 죽음의 억압에서 인간들을 해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해방을 얻으려면 인간들 쪽에서 간절하게 ‘영원한 생명’을 원해야 하고, 그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5)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5-9ㄱ).” 바오로 사도는 인간적으로, 또 세속적으로 남들이 높게 평가하는 것들을 ‘쓰레기’ 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쓰레기들은 그냥 미련 없이 모두 버리는 것이 ‘신앙인의 참 지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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