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고통받던 민중들 어깨위에 지워졌던 무거운 짐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그 짐은 근현대사 안에서 우리 나라 백성들이 짊어졌던 짐과 너무나도 흡사해서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불편한 이웃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그로 인한 수모와 피폐한 삶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안위는 손톱만큼도 없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펼쳐나갔던 정신 나간 반민족, 친일, 독재자들의 횡포 역시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연장시키기 위해 개헌이니, 유신이니, 계엄이니, 뭐니 하며 끊임없이 악법을 양산했고, 백성들에게 그릇된 이념과 역사관과 이념을 주입시키며, 선동하고 세뇌시켜 백성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놓았는데, 이 역시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악법으로 전락하고 만 율법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마치 농부가 가축에게 짐을 지우듯이 율법의 철저한 준수라는 힘들고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의 어깨에 올려놓았습니다. 결국 율법학자들은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을 수백가지의 이해 못 할 세칙으로 만들어 그 어떤 힘센 장수도 짊어질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준수할 수 없는 규정들은 결국 율법학자 자신들도 견딜수 없는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해방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멍에이긴 한데, 부담스럽지 않고 편한 멍에를 들고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말씀처럼 훨씬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치시고, 힘든 요구를 하셨지만, 그 멍에는 바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멍에는 율법학자들의 멍에처럼 인간을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절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은 단 두가지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헌신과 사랑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쓰라린 멍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무거운 짐이 된다면 그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분명 위로와 기쁨의 멍에가 될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얼굴을 기쁨으로 충만한 미소로 가득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