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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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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백봉 쪽지 캡슐 작성일2025-07-17 조회수32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5년 다해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의 의미>

 

 

 

복음: 마태오 11,28-30

 

 

 


LORENZETTI, Pietro 작, (1325)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만일 우리 평생에 하느님께 단 한 가지만 청할 수 있다면, 무엇을 청하시겠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건강이나 재물, 또는 자녀의 성공이나 가정의 평화를 떠올리실 겁니다. 모두 소중하고 귀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만약 제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 없이 “예수님의 마음, 곧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청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으로 사는 것도, 머리로 사는 것도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마음에서 나쁜 생각,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 15,19) 하시며 모든 것의 근원이 마음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 모든 관계의 질은 바로 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치 컴퓨터의 성능이 중앙 처리 장치(CPU)에 달려 있듯, 우리 인생의 방향과 평화는 마음이라는 ‘영혼의 운영체제’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늘 마음에 평화가 없던 한 부자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자신의 평화가 깨지는 이유가 시끄러운 주변 환경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새벽마다 우는 수탉 소리에 잠을 설친다며 수탉을 없앴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거슬려 높은 담을 쌓았습니다. 다음엔 삐걱거리는 집이 문제라며 집을 허물고 완벽한 방음 저택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소음과 사람을 피해 외딴섬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완벽하게 고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도 잠 못 이루고 괴로워했습니다. 이번에는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머릿속에서 윙윙대는 원망과 불안의 소리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평화를 깨는 외부의 것들만 고치려 애쓰다, 정작 평화의 원천인 자기 마음을 돌보지 못해 단 한 순간의 평화도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평화가 깨지는 이유를 끊임없이 외부에서 찾습니다. 내 배우자가, 자녀가, 직장 상사가 바뀌면 평화로울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 본래의 마음, 그 상처받고 뒤틀린 마음을 그대로 둔 채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사소한 일에 화가 치밀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교만해지거나 비참해집니다. 짜증과 불평이 관계를 망가뜨리고, 결국 우리 마음의 평화, 곧 안식을 산산조각 냅니다. 안식은 휴양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얼마나 달콤한 약속입니까? 그런데 그 안식을 주시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하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의 조건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인간적 노력의 정점을 넘어서는 ‘거룩한 교환’의 신비가 숨어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의 “돌 심장을 없애고 살 심장”을 넣어주시겠다는(에제 36,26 참조) 약속의 성취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결코 온유하고 겸손해질 수 없기에,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이식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그냥 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연습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심장 이식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의 마음을 선물로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을 나의 것으로 익히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운전면허를 땄다고 해서 바로 능숙한 운전자가 됩니까? 아닙니다. 좁은 골목길도 지나 보고, 빗길과 눈길도 달려보며 차와 한 몸이 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온유함의 성인으로 알려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도 본래 대단한 다혈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일 의식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고 온유함을 ‘연습’하여 마침내 ‘온유함’이 그의 제2의 본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바로 이 ‘배움’과 ‘연습’의 기회입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할 때,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몸이 고되고 피곤할 때, 바로 그 순간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연습할 최적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지금 어떻게 하셨을까?’ 질문하며 그분의 온유함을, 그분의 겸손함을 흉내 내보는 것입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랄랄’이라는 크리에이터가 연기하는 ‘이명화’ 캐릭터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제 갓 30이 넘은 젊은 엄마인 그가 60대 중년 여성 캐릭터를 그토록 실감 나게 소화하는 비결은, 어려서부터 남을 흉내 내며 관찰하고 연습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단순히 60대 아주머니를 연기하는 것을 넘어, 오랜 관찰과 연습을 통해 그 말투와 표정, 삶의 태도까지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과 같습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식받았다고 믿고,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마음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도록 의식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지라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그분의 마음이 정말 나의 마음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겉모습만 흉내 내는 ‘연기’가 아니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존재 자체가 변화하는 ‘체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은 누구의 마음을 비추고 있습니까? 혹시 여전히 상처받은 ‘나’라는 캐릭터의 슬픈 독백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온유와 겸손으로 바뀌지 않으면 어떤 좋은 환경에 가더라도 참된 안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그리고 이번 한 주간, 하느님께 단 한 가지만을 청해봅시다. “주님, 저의 굳은 마음을 뽑아내시고,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제게 넣어 주십시오.” 그리고 세상 속에서 그 마음으로 살아보는 연습을 시작합시다. 운전대를 잡듯, 배우가 역할에 몰입하듯,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장착하고 살아갑시다. 그럴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안식이, 하늘의 평화가 우리 삶 한가운데에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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