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내가 그늘이 되어주면 그늘도 내 편이 되어줍니다> 복음: 마태오 12,1-8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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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문제로 바리사이들과 논쟁하십니다.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을 두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며 무섭게 따져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굳은 마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안식일은 분명 ‘쉼’, 곧 안식을 위한 날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의 안식일에는 쉼이 없습니다. 사랑도, 자비도 없이 오직 차가운 규정과 판단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자비가 없는 곳에는 참된 안식도 없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자비의 실천이야말로 우리 영혼을 진정으로 쉬게 하는 안식일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안식은 무자비할 때 잃습니다. 자기를 무자비에 맡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첫 페이지부터 인류의 비극은 자비가 사라진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카인의 이야기입니다. 아우 아벨을 향한 시기심에 눈이 먼 그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그 무자비한 행동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벌을 내리시지만, 그 벌은 감옥이나 사형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2)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자비함의 첫 번째 열매는 바로 ‘안식의 상실’입니다. 이 비극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아기 예수님 시대의 헤로데 대왕을 보십시오. 그는 로마의 인정을 받아 왕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한 웅장한 건축물들을 세운 유능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어떠했습니까?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베들레헴의 무고한 아기들을 학살하라는 무자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헤로데가 자신의 왕좌를 위협할 수 있다는 망상적 두려움 때문에 사랑했던 아내 마리암네와 자신의 세 아들마저 서슴없이 처형했다고 기록합니다. 내가 무자비하면 나 자신을 무자비에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안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언제라도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 그 자체입니다. 무자비한 사람은 이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늘 남을 해치고 빼앗는 사람은,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둠이 빛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무자비한 마음은 자비가 머물 공간이 없습니다. 나를 안식일의 주인인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18세기 말, 조선의 가장 척박한 땅이었던 제주에는 김만덕이라는 비범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기생이 되었으나, 20대에 관아에 끈질기게 호소하여 양인 신분을 되찾은 뒤 포구에서 객주를 운영하며 제주 제일의 거상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성실함과 지혜는 큰 재산을 모으게 했지만, 그녀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부(富)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1794년(정조 18년), 제주 섬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최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극심한 흉년이 휩쓴 데다, 가을에는 거센 태풍이 섬을 강타하여 남은 곡식마저 바닷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마저 풍랑으로 대부분 유실되자, 섬 전체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거대한 절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김만덕은 평생을 바쳐 이룬 자신의 전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녀는 사재를 털어 육지에서 쌀 500여 석(오늘날 가치로 환산 시 수십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사들여와, 굶주림에 쓰러져가던 백성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그녀는 죽어가던 제주 백성들에게 생명을 이어주는 따뜻하고 너른 '그늘'이 되어주었습니다. 이 소식은 한양의 정조 임금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고 어질게 다스리고자 했던 정조에게, 신분과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어 거룩한 자비를 베푼 한 여성의 의로운 행위는 깊은 감동과 함께, 자신이 꿈꾸던 왕도(王道) 정치를 실현할 소중한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정조는 김만덕을 한양으로 불러 직접 치하하고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정조는 김만덕을 위해 또 다른 '그늘'이 되어줍니다. 당시 제주도민, 특히 여성은 국법으로 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김만덕의 위대한 자비를 기리기 위해 기꺼이 그 법을 넘어서는 특별한 배려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김만덕을 ‘의로운 여인’이라는 뜻의 ‘의녀(義女)’로 칭하며 내의원 의녀들과 함께 궁궐을 출입하는 최고의 영예를 주었고, 마침내 그녀의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때 김만덕은 재물이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소원의 지극함은 오직 한 가지, 한양에 올라와 임금님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고,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입니다.” 한평생 섬에 갇혀 살아야 했던 여인에게 금강산 유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정조는 그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을 흔쾌히 들어주었습니다. 왕의 세심한 배려 속에서 김만덕은 조선 팔도를 여행하며 꿈에 그리던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눈에 담는, 일생일대의 기쁨과 평화, 즉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김만덕과 정조의 이야기는 자비와 안식의 아름다운 상호작용을 보여줍니다. 김만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 위기에 처한 백성에게 생명의 그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라의 임금이 그녀의 편이 되어, 사회적 제약이라는 견고한 벽을 허무는 특별한 그늘을 제공했습니다. 김만덕이 베푼 자비는 그녀 자신에게 가장 큰 꿈의 성취라는 안식으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의 군인이었던 투르의 성 마르티노는 혹한에 떨고 있는 걸인을 보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군 외투를 칼로 잘라 덮어주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꿈에서 자신이 덮어준 그 외투를 입고 있는 예수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네가 아직 예비 신자이지만, 이 옷으로 나를 입혔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의 영혼은 한 번 체험한 주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세상이 주는 어떤 명예나 권력보다 더 큰 평화와 안식을 평생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불안과 안식, 이 두 가지 믿음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은 빼앗고 빼앗기는 무자비한 곳이다’라는 카인의 믿음, 혹은 ‘세상은 하느님의 자비로 채워져 있고, 나 또한 그 자비 안에 살아간다’라는 마르티노의 믿음. 이 두 믿음은 한 영혼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처럼, 자비와 무자비가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줄 마음이 있다면, 그 그늘이 나의 편이 되어줍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