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주님과 우정의 여정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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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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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7-21 | 조회수161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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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21.연중 제16주간 월요일
탈출14,5-18 마태12,38-42
주님과 우정의 여정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의 주님”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오늘 입당송 시편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주님이 떠받쳐주시기에 이렇게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함4,16), 얼마전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 행사를 한 김병조 에드몬드(80세) 수사의 상본에 씌어진 성구입니다. 20대 후반에 시작된 수도생활이 80세에 이른 것입니다. 수도원 금경축 행사에 다녀온 자매가 전해 준 일화가 재미있어 나눕니다.
‘“아침에는 수도성소가 있는 듯 하다가, 저녁에는 수도성소가 없는 듯 하다가...어영부영 살다보니 오십년을 살아왔는데 남은 여생도 어영부영 살렵니다.”라고 하셔서 많이 웃었습니다.’
‘어영부영’, 바로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삶임을 표현하는 말마디입니다. 성소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각자 고유한 성소의 신비앞에는 겸손한 침묵이 필요할 뿐입니다. 어제 복음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주님 환대에 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해설입니다.
“참된 우정은 하느님과 우리의 우정의 반영이다. 우정은 실로 우리를 진리와 선으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그분께 더욱 가까이 이끌어 들인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가정은 예수님과의 우정이-‘완전함이 아닌 사랑과 갈망안에서(in perfection, but in love and longing)’-꽃피어나는 장소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가정이 상징하는바 수도가정을 비롯한 모든 성가정들에 해당됩니다. 새삼 믿는 이들인 우리의 삶은 사랑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날로 우리 생명을 떠받쳐주는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여정인지요? 우리 삶의 모두인 주님과 우정의 여정은 동시에 배움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역시 겸손과 경청은 필수적 덕목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아이의 엉뚱한 질문에 답하면서 엄마는 새로운 것을 배워간다. 탁월한 경지의 스승도 마찬가지다.”<다산> ‘공자가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내게 질문한다면 힘을 다해 잘 말해주고자 했다.’<논어>
역시 다산과 공자는 우리 예수님을 닮은 인류의 영원한 스승입니다. 삶은 우연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손길 안에서 이뤄집니다. 일어나는 것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어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참으로 부단한 회개로 하느님의 뜻을 알아갈 때 더해지는 믿음이요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요나의 표징입니다. 여전히 편견의 무지에 눈먼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입니다. 바로 스승 예수님이 일으키는 표징을 보고 싶다는 이들의 질문이 그들의 무지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삶자체가 빛나는 표징들로,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으로 가득한 데, 삶자체가 주님 사랑의 기적들로 가득한 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할런지요! 예수님의 명쾌한 답변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예언자 요나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의 표징이 상징하는 바,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요 예수님 자체의 표징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느베 사람들을,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 남방에서 솔로몬을 찾아 온 남방여왕을 예로 들면서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요나보다 더 큰 예언자요 솔로몬보다 더 큰 현자(賢者) 예수님이심을 무지몽매한 세대와 제자들에게 깊이 각인시키는 예수님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와 더불어 이런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런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 하는 것이 무지에 대한 최고의 처방 명약이겠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우정의 여정에, 공동체의 지도자와 동료 형제들의 수준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택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12.3 계엄이후 대한국민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는 참 좋은 공부가 됐을 것입니다. 지도자도 훌륭해야겠지만 이와 상응하여 국민도 훌륭해야 합니다.
이집트 탈출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우리 대한국민들은 더할 나위없이 위대했고 훌륭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반만년 역사를 지닌, 온갖 국난을 극복해온 민초(民草)들의 나라요 문화강국이 아닙니까! 며칠전 <국민이 지키는 나라>라는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우리나라 곳곳에는 반듯한 열사(烈士)들도 의사(義士)들도 지사(志事)들도 많습니다. 모변호사의 육성에 공감했습니다.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그 어떤 권력도 우리의 자유를 대신 지켜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잘못된 것에 맞서며, 행동할 때, 민주주의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쉽게 얻어지거나,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탈출기의 모세는 불세출의 지도자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준 미달이라 모세의 애로가 참 큽니다. 하느님의 섭리 은총을 믿지 못하고 이집트군이 바짝 추적하자 이스라엘 백성의 배은망덕에 모세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 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바로 오늘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아마도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맞이했을 때 일부 친일파 국민들 역시 독립보다는 식민지 사람들로 머무르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시대정신,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역사공부가 절실한 작금의 현실입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이런 오합지졸의 이스라엘 백성을 살렸습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참으로 절체절명의 절망적 상황에서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의 적극적 개입과 도움으로 위기를 타개하는 모세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께 대한 신뢰와 온갖 참여의 노력으로 참 좋은 공동체를 이루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괴물같은 지도자가 아니라 모세같은 위대한, 기도하는 정치지도자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날마다 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며 주님과의 우정이 꽃피어나는 우정의 공동체를 만들어 줍니다. 오늘 하느님의 승리,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에 이은 탈출기 15장 모세의 노래가 장관이요 그 일부가 오늘 미사중 화답송입니다. 이 화답송 한 구절로 오늘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하셨네. 주님은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찬미하리라. 나 그분을 높이 기리리라.”(탈출15,2).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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