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의 봉헌 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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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영미 | 작성일1999-02-01 | 조회수4,439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내일은 주의 봉헌 축일이다. 마리아는 율법의 따라 자신의 정결례와 아기의 성전에서 봉헌을 위해 성전의 간다. 거기서 시므온의 예언을 듣게 된다. 부모가 된 입장에서 아들을 주님께 바치려 갔을 때 축복의 말을 들고 싶었을 것인데 마리아와 요셉이 들게 되는 말은 아주 어두운 말이다.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 말을 뜻하는 것은 수난이다. 보는 사람의 따라 여러 가지 성모님의 대한 해석이 나오는데 성모님이 이미 예수님의 모든 수난을 탄생 예고 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예" 했다는 이들과 대층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것은 몰랐을 것이라 하는 이들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매 순간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인데 내 묵상으로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난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까지 요구하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는 것으로 묵상하기 좋아한다. 물론 성모님이 어떤 심정 이셨는지 성모님과 주님밖에 모르는 것이나 이 세 가지 경우, 다 알았을 때와 조금 알았을 때 전혀 모르는 것 등등의 상태로 묵상을 골고루 하는데 그때마다 참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한가지 시므온과 마리아를 비교 해 본적이 있다. 즉 마리아는 그 시대의 모든 이스라엘 처녀들처럼 메시아가 오기를 바라고 메세아의 어머니를 찬미하면서 자신이 그 임마누엘의 선택된 동정녀 인줄 모르고 메시아가 오시기를 바라면서 동정을 봉헌 했고 장차 예수님을 낳으실 동정녀의 시녀가 되고 싶었다고 어느 성녀에게 말씀 하신 적이있는데 시므온은 성령이 가르쳐 주는 이를 기다리며 성전에서 살았다. 물론 그도 기도 했을 것이고 기다리는 것을 했을 것이며 자기 직분의 일을 다 했다. 그렇지만 마리아처럼 자신의 동정을 바치고 시종으로서 살고 싶다고 소망 하지는 않았다. 즉 한 묵상을 갖고도 이렇게 여러 각도로 볼 수 있고 묵상의 인물들 개개인을 통해 여러 가지를 묵상 할 수 있다. 자신과 그 인물들을 비교 할 수도 있고 그 인물의 대해서 그 성서 장면 속에 들어가 볼 수도 있고 이런 묵상을 아는 용어로서 공간 묵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공간 묵상을 할 때마다 약간의 시각을 달리 하는 것으로도 많은 느낌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작가만 묵상을 잘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상상하는데 유리한 정신 세계를 갖고 있을 뿐 묵상은 정말로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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