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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피신과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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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지형 쪽지 캡슐 작성일1999-02-20 조회수4,310 추천수3 반대(0) 신고

하느님,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시편 16,1

 

 

이는 사실 시편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구절이다. 그리고 설령 시편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가나 화답송 등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노래하였을 것이다.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혹은 "당신은 나의 피난처" 등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 시편에서 말하는 피신이란 말하고 우리가 흔히 일상사에서 사용하는 피신이란 말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우리는 주의 하여야 할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사에서 피신한다, 함은 무슨 잘못 따위를 저지르고 일시적으로 모면하기 위하여 추적하는 자를 피하여 몸을 숨긴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때 잘못은 대부분 피신하는 자의 몫이요, 쫓는 자는 대부분 오히려 정당한 이유를 가진 자이다. 즉 우리는 흔히 "자기가 잘못 했으니 도망가지...."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피신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한 번의 피신은 결국 또 다른 피신으로 이어지고 계속 나쁜 일들로 이어지기 쉽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피신의 이미지는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피신한다고 말하는 것도 뭔가 좋지 않은 의미를 풍길 수도 있는 것이다. 즉 흔히 교회 밖의 사람들이 빈정대듯이 하는 말, "잘못은 실컷 저지르고 일요일날 교회에 가서 잘못했다고 말하고 눈물만 흘리면 다냐? ....." 등의 말에 상응하는 상황, 즉 세상에서 잘못을 저지르고도 회개하기보다는 그냥 하느님 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숨어있고 또 하느님은 그런 사람을 내어놓지 않는 분위기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편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 피신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일단은 단순하게 말 그대로 몸을 숨긴다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이 잘못을 하지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들이 나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을 쫓아올 때, 그리고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의 결과는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던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자. 혹시 그런 경우가 있었던가? 그 폭력 앞에서의 두려움, 더군다나 주위에서 도움을 청할 아무런 이도 없을 때의 절망감을 한 번 생각해보자. 그리고 더불어 짧은 순간이지만 같이 떠오르는 분노와 수치감, 그리고 막연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 같은 것들도. 글쎄? 나에게 이런 예를 들어보라면, 나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녔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학교 내에 존재하는 소위 "짭새"라고 불리워졌던 폭력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데모의 상황들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고등학교 때 소위 "노는 아이들," 즉 학교내의 불량써클 혹은 폭력배들의 존재와 그들로 인해서 벌어지던 여러 상황들도 떠오르고. 어쨌든 이와 같이 폭력적인 악의 세력으로부터 쫓김을 당할 때, 참으로 안전하게 피할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군다나 그 곳이 단순히 일시적으로 숨어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요, 내가 참으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이며, 오히려 그곳에서부터 힘을 얻어 그곳에 있는 이들고 더불어 나와 나를 쫓던 무리들을 해치우고 사태를 완전히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시원함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한 편의 옛날 전쟁 이야기와 같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강력한 원군이 나타남으로 인해, 절망은 돌연히 희망으로 바뀌고 늘어진 육체에 갑자기 힘이 돌고, 그래서 사태는 완전히 역전되고, 그래서 승리와 그에 따른 진정한 휴식이 따르고... 뭐 이런 이야기가 시편의 시인들이 노래하는 피난처, 혹은 피신한다,라는 말과 더불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닐까? 이런 시원한 이야기가 아니면 최소한 싸움터에서 쫓기다가 간 발의 차로 참으로 견고한 성이나 요새 안으로 들어온 뒤, 성문은 닫긴 상태, 그래서 쫓던 적은 닭 쫓던 개 지붕 처다보던 식으로 그냥 속만 끓이며 있는 것을 보는 정도의 상황이면 어떨까? 아니면 이런 것 또 어떨까? 어린 아이들이 사나운 개 앞에서 무서워 어찌할 줄 모르며 도망치다가 눈앞에 그의 부모를 발견하고 달려가 품에 안겼을 때의 느낌. 어쨌든, 하느님께 피신한다함은 부당한 폭력에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어려움의 상태에서 하느님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발견하고, 그 요새의 문이 바로 자신을 위해 열려 있음을 발견하고 뛰어드는 것이리라.

 

그러나 하느님께 피신한다함은 조금 더 깊은 측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이 보다 온전한 의미를 살펴볼라면 예수님께로 눈을 돌려봄이 현명하리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쫓는 적을 피해 당신의 아버지께 피신하는 경우가 있는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장면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또 대제관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하인들을 데리고 횃불과 등불과 무기를 든 채 그리로 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닥쳐올 모든 일을 아시고 나서시어 그들에게 "누구를 찾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니 예수께서 "내가 그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넘겨 줄 자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내가 그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나며 땅바닥에 넘어졌다. 그러자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내가 그라고 당신들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러니 당신들이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버려 두시오" 하셨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셨던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때 시몬 베드로는 칼을 갖고 있었는데 그가 그것을 뽑아 대제관의 종을 후려쳐서 그의 오른편 귓바퀴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칼을 칼집에 넣으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한 18,3-11

 

예수님께서는 적으로부터 도망을 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계신다. 즉 적에게 스스로 몸을 맡겨 잡히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뭔가 항복하는 분위기하고는 다르다. 즉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며 손을 드시고 잡히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라는 한 사람을 잡기 위하여 잡으로 온 사람들은 군대와 하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등불과 무기까지 들고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아가실 때 놀라 넘어지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잡히시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말씀" 혹은 "아버지"와 관계되어서 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이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려고 그리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기에 받아 마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적들의 손에 자신을 남김으로써 아버지의 뜻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묘한 역설을 만들어 내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들어가니 이것은 분명히 "당신께 피신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뭔가 좀 다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지금 그를 잡으러 온 사람의 손에 맡기고 계시나 사실은 자신의 아버지의 손에, 그분의 섭리에 맡기고 계시는 것이다. 즉 그분을 잡고 묶으시는 분은 총칼을 든 유다가 아니라 그분의 아버지이신 것이다. 즉 그분의 피신이라 함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그분의 뜻을 완성하시려고 몸을 던지시는 온전한 투신인 것이다. 그리고 그 투신으로 인하여 바로 자신을 체포하는 이들에게까지 존재의 새로운 지평을 선사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참으로 하느님께 피신한다는 것의 깊은 의미를 그대로 펼쳐 보여주시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의미는 그분께서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에서도 다시 한 번 명백히 드러난다.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몸을 맡기심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의 영을 넘겨주시는 것이다. 참으로 엄청난 장면이다. 사실 루가 복음서에서는 이런 것이 더 분명한 말로 주어져 있다. 예수님께서 명백히 당신의 영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심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 피신한다 함은 바로 하느님의 섭리, 그분의 손길에 우리를 완전히 맡김으로써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투신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께로의 피신避身은 온전히 하느님 뜻에의 투신投身인 것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는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 식초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식초로 해면을 듬뿍 적시어 히솝가지에 꽂아서 그분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께서는 식초를 받으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며 영을 넘겨 주셨다.  요한 19,28-30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숨지셨다.  루가 23,46

 

 

* 너무 쓸데없이 긴 말을 늘여 놓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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