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늘 죽음을 체험하시는 분들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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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전재석 | 작성일1999-11-13 | 조회수2,297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어제는 성당의 연령회 회원들과 맥주집에서 자리를 같이 하였습니다. 연령회는 신자가 죽으면 장례에 대한 제반 일을 도와주는 모임입니다. 염을 하기도 하고 입관예절도 하며, 장지에 가서 기도하는 일 등을 합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웬만한 신앙심 없이는 하기가 어려운 봉사활동 이어서 지원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략 50대나 60대의 신자들이 주축을 이룹니다. 연령회 활동을 하기 어려운 것은 주검을 보아야 하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주검을 대한다는 것은 매일 나의 죽음을 묵상하여야 하니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두렵고, 어쩌면 ’나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란 단어 조차도 생각하기 싫어 피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봅니다. 그러나, 그 회원들은 남의 죽음을 통하여 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수가 있으니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려운 봉사를 하시는 분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기에 더욱 귀가 솔깃하여 늦게 까지 자리에 앉아있게 되었나 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장암으로 죽음을 앞 둔 대장암 환자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부모가 없고 남동생만이 있어 안마사 노릇을 하며 번 돈으로 동생을 공부시켰다고 합니다. 남동생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던 즉석에서 해결하여 줄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안마사라는 직업은 단순히 안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파는 그런 직업입니다. 병석에 눕자 기둥서방 노릇하던 사람도 떠났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게 되었고, 어제 자리를 같이 한 여자봉사자가 그녀를 찾아 기도를 하여 주었습니다. 병석에 누운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평안한 모습을 보여 왔으나, 죽음을 앞 둔 며칠간은 그 어둠의 세계에서 쓰는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고, 어쩌면 마귀와 같은 행세를 하였답니다. 봉사자는 그녀와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보기도 싫은 그런 상태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을 때는 얼굴이 너무 깨끗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죽기 전 며칠간은 어쩌면 마귀와의 싸움이 아니었겠냐고.
그 봉사자는 남편이 교수인 50대 중반의 여장부 스타일의 신자입니다. 봉사자는 또 말을 잊습니다. ’사람이 불행하지 않으니 나는 행복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친척 동생이 한 이야기를 합니다. 의미가 있는 말 입니다. 이 말을 들으며,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착각 속에 빠져있지 않는가 생각하여 봅니다.
서울로 올라온지 얼마되지 않아 어떤 자매님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 정도의 나이였습니다. 그 분은 성당에서 성경봉사도 하시고 여타 다른 봉사도 열심히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다른 분을 만나면 늘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대하는 그런 분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투병생활을 할 때에 ’하느님, 내가 왜 지금 죽어야 합니까?’라는 의문을 던지면 죽음을 잘 받아들이려 하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음 직전에 어떠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을 쓰신 그 신부님도 시베리아에서 당신이 계시던 캠프에서 소요가 일어나 그 캠프의 사람들과 함께 집단 총살형을 당하시게 되어, 총부리가 당신을 겨눌 때에는 하느님이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모스크바의 독방과 KGB의 모독에도, 그리고 하루 종일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하느님을 믿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수용소에서 비밀리 사목활동을 하신 영성이 높으신 그 분도 죽음 앞에서는 그런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인간의 신앙이 죽음 앞에서 거꾸러지는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나와 같이 신앙이 부족한 사람은 왜곡된 신앙을 가지고 사는지 모릅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환영(幻影) 속에 빠져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늘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주변에 좋은 결과가 올 때에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면서도 나에게 고통이나 소망스럽지 못한 결과가 나타나면 그것을 인내하지 못하고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기도도 덜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 자문을 하여 보면 그러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나의 기분에 들떠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죽음을 생각하기도 싫은 그런 상태인가 봅니다. 늘 누구에게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고 칭찬을 받지 못할 때에는 칭찬 받을 만한 일을 억지로 꺼내어 칭찬을 유도하는 말도 합니다. 골방에서 기도를 하였어도 골방에서 기도를 하였다고 떠드니 성전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리사이파와 다를 바가 없음을 통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앞두시고 ’목마르다’ ’주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하신 것이 하느님 이시면서도 온전히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약함을 다 체험하셨을 것이라 생각하여 봅니다. 대학을 다닐 때에는 ’죽을 때에 웃으며 죽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만, 언제 그렇게 될 수가 있을지…….. 하나씩 하나씩 비워달라고 주님께 깨어 기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매일 거룩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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