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바리사이였다(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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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1-03-02 | 조회수2,234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2001, 3, 2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복음 묵상
마태오 9,14-15 (단식에 대한 질문)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묵상>
사순 시기가 되면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며 회개와 보속을 하는 의미로 많은 교우분들이 나름대로 한 두가지의 실천사항을 정해서 묵묵히 실천합니다. 금주, 금연, 간식 줄이기, 커피 안 마시기 등 개인적 차원의 실천에서 평일 미사 참석, 이웃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인 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 실천입니다.
그런데 자칫 이러한 실천 행위 자체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실천을 하는지 그 근본 목적은 잃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보속하기 위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는 신앙 실천의 목적은 뒷전에 밀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위 자체에만 충실하려 한다면 바리사이파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 사순 시기에 참으로 소중한 체험을 하나 하였습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바리사이파가 된 체험이라고 할까요. 다음은 작년 3월 30일에 본당 게시판에 올린 체험담의 일부분입니다.
[ 어제는 술을 마셨습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금주를 했으니까 20일만에 마신 것이지요.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보다 술을 마시는 것이 더 괴로웠던 적은 아마 어제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은 없을 것이구요.
이 글을 띄울까 말까 참 많이 망설였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금주하겠다는 약속을 깬 것에 대해 변명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름대로 사순 시기 동안 자신의 다짐을 지키며 생활하고 계시는 벗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솔직한 것이 더 나을 것 같고, 또 제 나름대로는 어제의 일을 통해 값진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서울대교구 7지구(현 8지구-성동, 광진 지구) 청년연합회 회장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용희 지도신부님(비록 저의 본당 신부님은 아니었지만)과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어제 그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4월 1일 멕시코로 교포사목을 하기 위해 떠나시는데 환송회를 하게 된 것이지요. 이 신부님은 주임 신부님과도 매우 각별한 관계이십니다. 그래서 함께 만났지요. 주임 신부님께서 환송회 자리를 마련하셨는데 제가 거기에 함께 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사순 시기 동안 금주하는 것을 주임신부님도 알고 계시고, 이 신부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환송회 자리이니 만큼, 한 잔 따라드리고 분위기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떠올렸지요. 엄격한 안식일 규정을 깨뜨리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보다 안식일을 먼저 생각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율법을 지켜가다보니 율법이 하느님을 대신하고, 율법 준수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했을 법도 합니다.
여하튼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면서 속으로는 무척 많은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순 시기에 금주를 하겠다고 다짐했던가?' '혹시 환송회 핑계로 나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이자리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사순 시기동안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던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내 자신을 드러내려는 위선적인 것은 아니었던가?' 서로 상반되는 생각들이 왔다 갔다 했지요.
'혼인 잔치집에 신랑과 함께 있는 친구들이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단식은 주님께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데,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고 단식이라는 것이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를 시험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다짐(단식이든 금주든 금연이든 이것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을 깨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어제는 저의 다짐을 깨뜨렸기에 아쉬운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만들어 놓은 율법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던 값진 날이었습니다.
부활까지는 앞으로 많은 날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계속 금주를 할 것입니다. 저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금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칫 저 자신을 과시하려는 인간적인 충동이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핑계일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는 별다른 실천 사항을 정해놓지 않고 사순 시기를 시작했습니다. 굳이 하나를 들자면 한동안 제대로 게시판에 올리지 못했던 복음 묵상을 매일 빠뜨리지 않고 게시판에 올리는 것을 들고 싶습니다. 복음 묵상을 통해 주님을 더 깊이 있게 만나고 이를 믿음의 벗들과 나누는 사랑의 실천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의 의지력 시험으로 전락할 염려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식이라는 행위에 집착했던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다짐을 해도 많은 순간 이 어리석음에 걸려 넘어지겠지만, 그래도 오늘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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